점점 빨라지는 어머니의 시간을 붙잡고 싶습니다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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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한 기자]
분 떼고 시간만 계산하는 어머니
어머니에겐 이상한 시계가 있다. 이게 딱히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고 어머니의 머릿속에서만 작동하는 굉장히 편파적이고 부정확한 시계다.
우선 어머니에게 분 단위의 시간은 의미가 없다. 언제나 정각을 기준으로 시간을 알게 되는데,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한아~ 벌써 7시다. 인나라." (6시 30분)
"한아~ 12시 다됐다. 언능 자라." (11시20분)
어머니의 시계에는 분침과 초침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 덕분에 시간을 계산할 때도 부정확할 수밖에 없는데, 많은 경우 지나치게 오차가 커 당황할 때가 많다.
"내비로 찍어 보니 1시간 10분 걸리네요."
"2시간? 그라모 지금 나가야 되것네."
"… 네? 1시간 밖에 안 걸…"
"아~ 2시간 맞아! 지금 가~"
▲ 시침뿐인 어머니의 시계 시간에 있어서는 디테일이 없는 어머니 |
ⓒ Pixabay |
이 시계가 배꼽 언저리로 내려가면 그 파급 효과를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밥 먹은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뭐 먹을 건지 정해야 할 때다.
"뭐 좀 무야지~"
아직 배부르다는 내 대답에 먹은 지 한참 됐는데 무슨 소리냐며 어머니는 이것저것 먹을 것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밥 먹은 지 한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나의 항변은 으레 그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시계에 묵살되고 만다.
"한 시간? 벌써 두 시간이 다 돼가고만..."
저기, 어머니? 이제 막 5분이 더 지났을 뿐인데요? 제 커피는 아직도 온기를 잃지 않았답니다. 어머니? 아무리 간곡히 얘기해도 '밥 먹은 지 두 시간이 지난' 어머니의 손은 분주하기만 하다.
냉장고에 라면 보관하는 어머니
어머니에게는 이상한 달력도 있다. 이것 역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머니만의 부정확하고 편파적인 달력인데, 보통 음식의 유통기한을 최소 두 달을 당겨버리는 데 사용된다.
"벌써 유통기한이 다 되가네. 쩝."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요?"
"아이라, 인자 일주일 남은 기라."
▲ 어머니의 이상한 달력 유통기한과 예정되지 않은 시간을 당겨오는 조급한 달력이다. |
ⓒ Pixabay |
라면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유통기한이 붙어 있는 것들은 제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조기에 소진된다. 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운 어머니는 철저하게 제조일자를 확인하고 물건을 사들여 기한 안에 처리한다. 매 순간 매의 눈으로 식료품을 훑으면, 왠지 내 눈에는 그것들이 움찔하는 것만 같아 묘한 웃음이 날 때도 있다.
그런 달력을 보고 계셔서인지 어머니는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뉘앙스의 멘트를 종종 흘린다.
"너그 누나가 입으라고 사줬는데, 내가 앞으로 입으면 몇 번을 입것노?"
"대용량이 더 싼데, 남으면 누가 쓰것노. 그래가 작은 거 샀지."
이제 갓 70세가 되어서는 그런 말하면 어른들께 혼난다고 말씀드리지만, 그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쏟아내곤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짓고 만다. 자꾸만 모든 것의 기한을 앞으로 당겨 오는 어머니의 달력이 너무 앞서 간다.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볼 수 없는 당신의 달력에 무슨 표시라도 있는 건지 자꾸만 앞당겨 생각하는 어머니다.
아무래도 이런 진지한 모습이 탐탁지 않은 나는 어머니의 이상한 시계를 빌려 와 되지도 않을 애드립을 던진다.
"밥 먹은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뿟네."
"진지해지지 말고 진지나 지어 먹지예!"
미숙한 애드립의 결말은 과식이지만, 복부의 고통이 선명해지는 동안만큼은 어머니의 근심이 흐릿해지는 듯해 마음만은 편해진다.
어머니의 시간이 이해되는 나이
시간이 쏜살같다는 말을 체감하는 나이가 되고 보니 어머니의 시계와 달력이 그전처럼 이상하지만은 않다. 마치 이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어떤 심오한 원리가 어느새 조금은 이해된다고 해야 할까. 자식을 둔 부모가 되어 보니 내 안의 시계와 달력도 조금씩 오차가 생기고 있다. 조금은 빠르고 조금은 앞서 간다.
어머니의 시간은 그저 가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가족을 생각함에 있어 어머니의 시간은 나의 그것보다 훨씬 빠르고 부족하기 만해 자꾸만 어머니를 초조하게 만든다.
몇 장 남지 않았다는 달력의 날짜를 당기는 것처럼 어머니의 모든 시간은 그렇게 앞서 간다. 그런 어머니의 시간을 붙잡기 위해 나는 오늘도 손이 많이 가는 아들을 자처한다.
"어무이, 뭐 먹을 거 없으예?"
"뭐 더 주꼬? 그라고 본께 밥 문지 한참 됐네."
조금 전 먹은 밥이 아직 소화가 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대답에 묻어나는 가벼운 흥이 더 깊은 속을 편안하게 만든다.
"어무이, 포크는 안 줍니꺼?"
"고마 처묵지... 내가 잘못 키아쓰..."
과일을 집은 포크를 내 손에 쥐어주며 투덜대는 어머니. 그럼에도 당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음에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바삐 흘러가는 시간을 오늘도 잠시 멈춰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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