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지각에 김정은 홀로 영접…차르 예우, 시황제 때와 달랐다

이근평, 오욱진 2024. 6. 1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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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4년 만 방북길은 ‘차르 맞이’ 치고는 단촐했다. 예상을 훌쩍 넘겨 18일 자정도 지난 뒤 도착한 푸틴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수행단도 없이 홀로 영접하는 등 국빈방문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들이 곳곳에 포착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새벽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영접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김 위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푸틴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푸틴과 대규모 수행단, 국빈방문 초유의 지각 사태

푸틴은 러시아 극동 사하 공화국 야쿠츠크에서 일류신(IL)-96 전용기를 타고 19일 오전 2시 45분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항공기 추적 사이트 등에 따르면 이번 방북에 동원된 항공기는 최소 4대다. 이 중 한 대는 18일 오전에 도착했고, 나머지는 18일 밤~19일 새벽 사이 순차적으로 착륙했다.

먼저 도착한 비행기에는 정상회담 의제 협상이나 의전 및 경호 조율 등을 맡은 러시아 당국자들이 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직항편이 마땅치 않은 ‘은둔의 도시’ 평양에 대규모 수행단을 보내기 위해 러시아는 대통령 전용기로 보유한 해당 기종 전부로 알려진 4대를 모두 띄워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초 푸틴과 수행단의 평양 도착 시간은 전날(18일) 오후 9~10시 사이로 예상됐다. 하지만 푸틴의 ‘지각 기질’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국빈 방문에 예정 도착일을 사실상 넘겨 다음날 새벽에 도착한 건 전례를 찾기 힘든 외교적 결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질문이 따라붙는 이유다.


홀로 영접 김정은…5분 걸린 공항 환영식

김정은은 그런 푸틴을 예상보다 간소화한 의전으로 맞았다. 지각 도착으로 준비했던 행사를 다 진행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김정은은 혼자서 뒷짐을 진 채 비행기에서 내리는 푸틴을 기다렸다가 환하게 웃으며 악수한 뒤 두 차례 가볍게 포옹하고 차량으로 이동했다. 이후 러시아산 최고급 리무진 아우르스 뒷좌석 오른편에 푸틴이 먼저 타고 김정은이 왼쪽에 앉았다. 해당 차종은 푸틴이 김정은에게 지난 2월 선물한 것과 같은데, 러시아가 항공편으로 직접 본국에서 공수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푸틴이 전용기에서 내려 숙소인 금수산 영빈관으로 출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5분 가량에 불과했다. 예상됐던 예포 발사, 양측 국가 연주, 카퍼레이드 등 환영 행사가 생략되면서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9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도착 소식을 전하며 "최대의 국빈으로 열렬히 환영한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

공항에서 김정은의 의전을 담당하는 현송월 노동당 부부장을 제외하고는 북한 주요 인사가 포착되지 않은 것도 이례적이었다.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부인 이설주는 물론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나타나지 않았다. 외빈 영접에는 기본으로 포함되는 인사인 최선희 외무상도 없었고, 강순남 국방상 등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김정은 외에 푸틴을 맞이한 인원은 꽃다발을 건넨 보라색 한복을 입은 북한 여성과 의장대 정도였다.


외교 결례 푸틴에 의전 수위 의도적으로 조절했나

이는 2019년 6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14년 만에 방북할 당시 공항에서부터 성대하게 맞았던 것과도 대조된다. 북한은 21발 예포를 쏘고, 25만 명 평양 주민을 동원해 카퍼레이드를 진행하는 등 최고의 예우로 시 주석을 맞았다.

일각에선 새벽 시간대라 해도 북한 체제 특성상 김정은 결심에 따라 일정 수준 이상 환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김정은이 의도적으로 의전 수위를 조절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사실상 외교 결례를 범한 푸틴에게 과한 의전은 자칫 푸틴이 김정은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상하관계를 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초라한 장면을 피하기 위해 나름 신경을 쓴 점 역시 눈에 띈다. 조선중앙통신은 양측 정상이 “황홀한 야경으로 아름다운 평양의 거리들을 누비면서 그동안 쌓인 깊은 회포를 풀었다”고 전했다.

실제 통신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이들이 탄 아우르스는 환하게 불이 켜있는 고층 건물 사이를 통과했다. 지각한 푸틴을 기다리느라 극심한 전력난에도 새벽까지 야경을 연출한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새벽 평양에 도착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영접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평양 류경호텔 대형 전광판에 '환영 뿌찐'이라는 문구가 표시돼 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크렘린궁은 중앙일보 보도 편집…‘찬물 요소’ 관리했다

러시아 크렘린궁이 한국 언론 반응을 검열해 소개한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크렘린궁 텔레그램은 한국 주요 언론이 푸틴 방북 소식을 전한 뉴스 홈페이지 메인 화면을 다수 소개했는데, 중앙일보 홈페이지를 캡처하면서 전날 이뤄진 한·중 외교안보대화와 푸틴의 지각을 다룬 기사 제목을 삭제한 채 게재했다. 중국이 한국을 만난 뒤 푸틴 방북에 대해 “원칙적으로 환영한다”는 입장을 “역내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고 바꾼 내용을 다룬 기사와 푸틴의 지각이 의도적일 수 있다는 기사를 통으로 편집한 것이다.

북·러 정상회담의 ‘찬물 요소’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도로 러시아 역시 그만큼 이번 방북에 공을 들이고 있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러시아 크렘린궁이 캡처해 텔레그램에 게재한 중앙일보 홈페이지 메인 화면(오른쪽)과 원래 홈페이지 화면(왼쪽). 크렘린궁이 올린 사진에는 한중 외교안보대화, 푸틴 지각 등 내용이 삭제됐다.


푸틴은 이날 오후부터 공식 일정에 나섰다. 크렘린궁 텔레그램은 푸틴과 김정은이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환영행사에 참여한 뒤 정상회담을 시작했다고 12시40분 전했다. 푸틴은 이밖에 공동 문서 서명, 언론 발표, 환영 만찬 등 일정을 소화한 뒤 다음 행선지인 베트남 하노이로 출발할 예정이다. 하노이에서의 환영식은 밤 12시로 예정돼 있다. 다만 푸틴의 추가 지각 가능성 때문에 구체적인 시간은 여전히 미정이다.

이근평·이유정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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