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만의 순례길을 창조했다
[김진우]
▲ 배낭의 크기와 무게가 순례길의 질을 결정한다. 떠나기 전 처음 배낭의 무게는 10kg가 넘었다. 그걸 줄이고 줄여 6kg짜리 배낭을 만들었다. 그래도 하루의 걷기를 마무리 하고 나면, 문장에서 토시 하나라도 덜어내듯이 눈에 불을 켜고 더 버릴 것이 없는지 살핀다. 첫 일주일간 이 일정은 최소화, 단순화, 경량화의 최전선에 도전하는 진지한 의식이었다. |
ⓒ 김진우 |
오후 1시경 숙소에 도착해 침대를 배정받고 등산화를 벗는다. 오늘도 잘 버텨준 내 신발과 발에 감사한다. 샤워를 하고 다음날 입을 옷으로 갈아입고 빨래를 한다. 다음 날 아침에 필요한 몇 가지(칫솔, 치약, 선크림, 수건)를 따로 빼놓고 나머지 물건을 침대 위에 펼친다. 문장에서 토시 하나라도 덜어내듯이 눈에 불을 켜고 더 버릴 것이 없는지 살핀다. 첫 일주일간 이 일정은 최소화, 단순화, 경량화의 최전선에 도전하는 진지한 의식이었다.
떠나기 전 처음 배낭의 무게는 10kg가 넘었다. 그걸 줄이고 줄여 6kg짜리 배낭을 만들었다. 매일 먹는 약, 비타민, 선크림, 비누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 외에는 1그램도 못 줄일 것 같았다. 그래도 하루치 걷기를 마무리하고 나면 한 번 더 살핀다. 아이섀도, 파우더 팩트, 고체 샴푸와 린스, 변화무쌍한 날씨에 필요할 것 같았던 얇고 가볍고 비싼 실크 스카프, 썬 캡, 내 작품 사진으로 만든 엽서 5장, 혹시 몰라 챙겼던 작은 수첩, 볼펜 두 개 중 하나가 순서대로 배낭에서 퇴출됐다.
물건이 사라진 순서를 보면 그 와중에도 내가 어디에 더 집착했는지 알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화장이 필요 없거나 어색하다는 것은 하루 만에 깨달았고, 비누, 샴푸, 린스를 따로 쓰는 것이 엄청나게 거추장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바로 알았다. 새벽의 추위와 한 낮 어지러운 스페인의 태양으로부터 보호해 줄 챙이 넓은 모자 하나면 충분했고, 제법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친구들을 여럿 사귀었지만, 거기서 내 작품 얘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기나 기록은 스마트 폰 속에 있는 앱으로 충분했고, 같은 기능을 가진 물건(볼펜)이 두 개일 필요는 없었다. 만약 잃어버리면 하나 사면되는 것이고.
다만 스마트폰의 존재는 크기, 부피, 무게 대비 거대하고 절대적이었다. 여권도 분실하면 재발급받으면 되지만, 스마트폰 없는 순례길은 불가능하다. 교통편 및 숙소 예약, 길 찾기, 환전, 결제가 모두 폰 안에서 이뤄진다. 혹시 스마트폰을 분실하거나 고장 나면 어쩌지, 생각해 보면 답이 없다. 기존 폰에 등록된 신용카드를 정지시켜야 할 테니, 새 폰을 장만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줄을 잇는다.
딱 한번 내 배낭이 엉뚱한 곳으로 간 적이 있다. 이미 30km 이상 걸은 날이었다. 하루 정도 배낭이 없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생각해 봤다. 다음날 더러운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등 몇 가지 불편함이 생각났지만 대개는 견딜 수 있었는데, 핸드폰 충전이 문제였다. 결국 땅에 붙어버릴 것 같은 다리를 끌고 가 배낭을 찾아왔고, 이후 충전기는 반드시 복대에 넣고 다녔다. 스마트폰이라는 절대 권력자와 어떻게 관계 맺고 살아가야 하는가는 순례길에서도 내내 이어지던 질문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 <단순하게 살아라>(베르너 퀴스텐마허 저, 유혜자 역, 김영사, 2021) 같은 책을 지도교수 삼아 한 학기에 한 번쯤은 집과 연구실의 물건을 버린다. 빠져나간 물건만큼의 기운이 내 공간을 채우며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 준다. 하지만 여전히 물건은 쉬이 쌓이고, 그만큼 나도 무거워진다. 예전보다는 더 자주, 더 엄격하게 덜어내리라 결심해 본다. 순례길의 교훈과 훈련이 만든 변화가 오래 지속되기를...
▲ 산티아고 대 성당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순례길을 찾았던 사람들의 발길, 손길, 사연, 이야기, 기도, 눈물이 응축되어 성당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
ⓒ 김진우 |
산티아고를 20km 앞둔 오 페두르조(O Pedruzo) 마을에 있는 성녀 에우랄리아 성당. 그곳에서의 미사는 가톨릭 예식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마지막 걸음을 응원하는 행사 같았다. 순례자이기도 한 미국, 이탈리아, 한국의 신부님들이 함께 미사를 집전했고, 스페인 신부님은 제단에서 내려와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순례자들에게 일일이 어디 나라에서 왔는지 물었다. 자원봉사자가 되어 돌아온 청년들이 기타를 반주하며 성가를 불렀다. 다음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의 미사만큼이나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적 이유와 상관없이 이 길을 걷는다고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순례길에서 매일 만나는 성당에서는 종교를 뛰어넘는 어떤 기운이 느껴졌다. 공간디자인 전공자로서 건축 언어, 빛, 재질, 조형미 등에 압도되어 본 경험은 무수히 많지만 그와는 다른 종류의 감동이었다. 물론 스페인 성당 건축은 아름다웠다. 산티아고, 레온, 부르고스, 세비아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양식의 결정판이다. 특히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 제단부의 화려한 장식은 스페인과 스페인 가톨릭 역사를 생생하게 대변한다.
▲ 원래 말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면 선물로 줄 생각이었던 세월호 팔찌 20개는 순례길 중간 중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고 왔다. 팔찌를 놓을 때마다 2014년 4월 16일, 별이 된 아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 아이들 덕분에 내 순례길이 특별해졌다. |
ⓒ 김진우 |
위의 네 가지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생각난다. 순례길 중간중간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고 온 세월호 노란 팔찌 20개, 순례자의 저녁 식사에서 만나 이제는 '베프'가 된 영국, 호주, 덴마크, 일본, 타이완에서 온 친구들과의 대화, 인구가 몇 백 명밖에 안 되는 마을에서 먹었던 싸고 맛있고 풍성했던 스페인 음식과 와인, 혼자 걷는 고독의 시간에 문득 내 기억 속 어딘가에서 튀어나와 한동안 함께 걸었던 예상 밖의 사람들, 성당의 촛불을 밝히며 했던 기도, 나라 전체가 공원처럼 느껴지던 스페인의 숲과 벤치들, 순례자들에게 친절했던 스페인 사람들과 "부엔 카미노"(스페인어로 '좋은 길'이라는 뜻. 순례자들끼리 나누는 인사말이다).
이 모든 것에 앞서 내가 아프거나 다치지 않고 걸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내 몸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아프거나 다치면 핑계 김에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맛있는 음식과 여유를 즐기다 돌아오자고 생각했다. 무릎이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강력한 무릎 보호대를 상시 착용했고, 내리막이 심한 코스는 버스로 이동하거나 동키 서비스(배낭을 다음 숙소로 보내주는 서비스)를 이용했다. 내 몸과 한국인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순례길에 대한 기대가 상대적으로 낮은 덕분에 만족도가 높았는지도 모르겠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블로그와 SNS에는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표현이 많았다. 나를 찾는다... 그게 그렇게 어려워 우리는 비싼 돈과 시간을 들여 그 멀리까지 가서 힘겹게 걷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버나드 쇼가 말한 "인생은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를 창조하는 과정이다"라는 말이 좋았다. 친구들과도 "나만의 카미노를 창조하자(Creating our own Camino)"는 말을 많이 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지구촌의 축소판이다.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걷지만 매일매일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곳에서 묵는다. 속도와 결이 제각각이다. 그 거대한 물결 속 미미한 한 점이 되어 2024년 5월 나는 나만의 순례길을 창조했다.
다들 자신만의 순례길을 창조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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