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민경배 (13)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권’ ‘한국교회사학회지’등 간행

손동준 2024. 6. 19.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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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학회는 그 첫 사역으로 장로교 총회가 편집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권 1912~1923'을 1968년 간행할 수 있었다.

이사장에 박옥선 목사를 모셨는데 그분의 공로로 연구원이 크게 발전하고 더구나 국제회의를 여러 차례 개최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그렇게 본다면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첫 졸업생 중에서 후에 교수로 임명됐던 한국 최초의 대학교수 박서양은 백정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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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과정까지 백낙준 박사의 공적 커
박옥선 목사와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창설
학술지 ‘교회사학’을 연간으로 간행
민경배 박사가 1968년 한국교회사학회를 통해 간행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권’

한국교회사학회는 그 첫 사역으로 장로교 총회가 편집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하권 1912~1923’을 1968년 간행할 수 있었다. 이 귀중한 사료는 1965년 백낙준 박사가 일본 도쿄 한인교회 목사 오윤태 박사가 비장하고 있었던 천하고본이다. 사정사정해 겨우 복사했다. 미농지 먹지복사본 전책 404장에 이른다. 나는 이 한문 천지의 미농지 복사본을 당시 가정대학 재학생 조명선에게 부탁해 그의 친구 부친이 정자(正字) 복필을 하게 해 완성했다.

그때 그 난지난사를 완성하신 분에게 제대로 사례를 못 한 것이 지금도 송구스럽기가 그지없다. 그 정사본은 삼육대학교의 이영린 교수의 조판작업과 기금으로 출판할 수가 있었다. 대단한 귀중본을 이렇게 해서 우리 사고에 비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9년에는 ‘한국교회사학회지’를 낼 수 있었다. 한국 교회사학 활동의 문을 열고 정성을 다하셨던 백낙준 박사의 공적은 영원히 잊을 길이 없다.

내가 한국교회사학연구원을 창설한 것은 1997년 6월의 일이다. 이사장에 박옥선 목사를 모셨는데 그분의 공로로 연구원이 크게 발전하고 더구나 국제회의를 여러 차례 개최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2001년부터는 ‘교회사학’이란 학술지를 연간으로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원은 특히 김교신 이용도 김인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의 이들 연구는 우리 연구원이 불꽃을 당기고 있었다.

우리 연구원을 만대에까지 계승 발전하게 해야 한다는 기도로 매달 초 월례발표회를 한다. 이달에 304회를 맞는다. 월례 세미나는 대개 반 시간가량 기도회로 시작해 2부 학술발표로 연결된다. 처음 시작할 때 같이했던 동료 제자들이 더러는 떠났고 제2대를 방불케 하는 새로운 구성원들이 많이 참여한다.

연세대 신과대학에서는 나의 직계 제자가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 신과대학에 실제 교회사 교수는 없다. 시간 강사로 여럿이 바뀌는 모양이다. 교수 채용 방식이 일률적으로 외형상 조건을 갖춰야 하므로 그런 형식에 맞지 않고는 교수가 될 수 없는 시스템이 문제이다. 일제 치하 연희전문학교의 저명한 교수 정인보는 서당 출신이다. 더구나 그때 유억겸 교수는 조선 말기 순종의 동서였다. 그렇게 본다면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첫 졸업생 중에서 후에 교수로 임명됐던 한국 최초의 대학교수 박서양은 백정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나는 1984년 50세가 되던 해에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일본의 거대 교회사학자인 친우 도히 아키오 교수의 도움으로 논문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10여년 전 타계했지만 그와 함께 1963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교회사학자회의에 함께 참석한 이래 아주 돈독한 관계로 지내왔다. 여러 차례 한국에도 왕래했다. 그의 도움과 사료로 내가 추천한 제자 여럿이 도시샤대학에 유학하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사실 그와 가까이 지내면서 동북아교회사학협의회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박옥선 목사님을 모시고 도쿄에 가서 당시 일본 그리스도교 사학회 회장 아라이 사사구 박사를 만났다. 이후 우리는 동북아시아 교회사학 발전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논의했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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