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테제베 공장의 커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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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 전 현대로템 이사는 1994년 한국에 없던 고속열차 설계 기술을 이전받기 위해 프랑스 알스톰사에 1년간 파견된 연구원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우리가 해주는 기술 이전은 스틸 차체에 대한 것이지 알루미늄 차체가 아니다"며 잘라 거절했다.
한국 기업들이 알스톰에 "성실한 기술 이전을 촉구한다"는 서한을 발송한 일도 있었는데, 프랑스인인 알스톰의 한 자회사 대표는 한국 국회에 나와 "문화와 언어 차이로 인한 오해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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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 전 현대로템 이사는 1994년 한국에 없던 고속열차 설계 기술을 이전받기 위해 프랑스 알스톰사에 1년간 파견된 연구원이었다. 그는 테제베(TGV)를 만든 알스톰의 한 차체 공장에서 강철 구조인 KTX를 어떻게 만드는지 배웠다. 그가 차체 공장에 나올 때 한켠에는 대형 커튼이 쳐졌다. 커튼 너머에 뭐가 있느냐 물으니 프랑스인들은 “알루미늄 차체로 전동차가 제작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철보다 가볍지만 경도가 좋은 알루미늄으로 열차를 만든다는 말에, 이 전 이사는 신기해서 “잠깐 들어가 구경만 하자”고 했다. 어차피 한국엔 구현할 기술이 없었고 이 전 이사가 도면을 보자고 청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우리가 해주는 기술 이전은 스틸 차체에 대한 것이지 알루미늄 차체가 아니다”며 잘라 거절했다. “기술 보호란 참 무섭구나 생각했다.” 이 전 이사는 차체 공장 한켠을 가리던 대형 커튼을 30년 흐른 이날까지 기억한다. 그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아웃 오브 스코프(out of scope·범위 밖)”였다. 그에게 이전된 기술은 철저히 KTX 도면과 사양서 안에만 머물렀다. 이 전 이사는 엔지니어의 본능으로 “이걸 왜 이렇게 설계했느냐” “이렇게 바꿔서 하면 안 되는 것이냐” 묻곤 했다. 알스톰은 1년 내내 “도면과 똑같이 만들도록 가르치는 것일 뿐, 설계의 근본 원리까지 묻는 건 계약 범위 밖”이라고만 답했다.
당시 한국인 근로자들은 자기소개를 하면 “너희 회사는 실력이 좋냐”는 말부터 들었다. 한국 기업들이 알스톰에 “성실한 기술 이전을 촉구한다”는 서한을 발송한 일도 있었는데, 프랑스인인 알스톰의 한 자회사 대표는 한국 국회에 나와 “문화와 언어 차이로 인한 오해였다”고 말했다. 한국은 프랑스의 흔적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며 기어이 알루미늄 차체로 된 2세대 ‘KTX-산천’을 완성했다. 동력장치가 객차마다 분산 배치된 동력분산식 3세대 ‘KTX-이음’도 개발했다.
한국 고속철은 이제 한국 범위 밖에서 달린다. 우즈베키스탄은 14일 현대로템·한국철도공사(코레일)와 시속 250㎞급 고속철 42량 공급계약을 맺었다. 동력분산식의 기술력과 효율, 그리고 코레일이 유지보수 기술 이전을 약속한 점도 수주 배경이 됐다. 우즈베키스탄은 스페인 탈고사의 고속철을 들여와 13년간 운행했지만 아무런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열차 부품이 고장 나면 모듈을 떼어 스페인에 보낸 뒤 고쳐져 돌아오기만 기다려야 했다.
협상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우즈베키스탄에는 수십 년 전 한국과 같은 기회가 주어졌다”며 “기술 자립 ‘드라이브’가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마이크를 넘기기 전 “우리는 한국의 발전 경험을 적극적으로 이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쿡사로이 대통령궁 회담장 한국 측 자리에는 대통령, 장관, 대통령실 수석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진 만년필이 놓였다. 호의 밑에 숨은 결의를 못 보는 무능한 관료는 없다.
순방 외교는 화려한 만찬 따위로만 인식된다. 그 이면은 기술패권에 누가 가까운지 가늠하고, 정직한 설움을 주고받는 전쟁이다. 이 전 이사는 현대로템의 공급계약 소식에 “비록 난 회사를 나왔지만 축하한다”며 “‘한국형 고속열차 기술개발’ ‘해무 430’ 등 국가적 프로젝트 지원까지 포함한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수출길을 연 것”이라고 말했다. 알스톰 공장 커튼 너머를 끝내 보지 못하던 그가 “지금 일하는 연구원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이경원 정치부 차장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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