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이재명, 더 평등하다
23년 전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 민주당 내 개혁그룹이 요구한 건 다섯 가지였다. 비선 라인의 국정·당무 개입 금지, 당내 민주주의 확대 등이었다. DJ(김대중)는 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이게 민주당에서 당·대권 분리의 시작이었다고 우상호 전 의원은 기억했다. 그는 “3김 시대의 사당(私黨)화를 극복하고 정당 민주주의를 정착하자는 것”(『민주당 1999-2024』)이라고 설명했다.
DJ의 기록은 좀 달랐다. 지도부의 수습책이 공허했다고 여겼고, 당 총재직 사퇴는 자신의 결단이라고 했다. DJ는 “총재를 맡고 있는 한 당권과 대권 싸움에 나를 끌어들일 게 분명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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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대권 분리 폐지, 판검사 제재 등
이 대표 위한 당·국회 내 행태들
특수계급 금한 헌법에도 반한다
」
어찌 됐든 그렇게 시작된 민주당의 당·대권 분리 제도가 그제 사실상 폐지됐다. 더불어 각급 당직자의 부정부패 혐의 기소 시 직무 자동정지 조항도 없어졌다. 2022년 대선 직후 예외 조항(정치탄압 등)을 두었는데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웠던 모양이다.
한국 정치의 퇴행이다. 사실 퇴행 자체는 놀랍지 않다. 하도 빈번해서다. 하지만 이재명 대표 주변에 거대한 ‘힘의 장’이 있는 듯, 한국 민주주의 진전을 가능케 했던 것들이 일그러지는 속도와 정도, 방향에 진정 놀라게 된다.
당·대권 분리나, 기소 시 직무 자동정지는 그나마 당 사정이다. 인천의 5선 의원이, 더욱이 인천시장까지 지낸 인물이 뜬금없이 서울시장으로 출마하고 그 덕분에 이 대표가 의원 배지를 단 건 기괴했으나, 복잡다단한 인간사의 부조리극으로 넘길 만했다. ‘일하는 국회’란 명분으로 1987년 체제 아래 여당 몫이었던 국회 운영위원장을 민주당이 차지한 건 ‘원만한 국회 운영’을 위한 가드레일을 없앤 것이라 씁쓸했으나 극단적 진영 전쟁의 파생이려니 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행정부, 더 나아가 사법부를 겁박하는 제도를 찍어내는 도구로 입법부를 쓰려는 데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중형 선고 후 극심해졌는데, 이 대표의 방어에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길 법한 건 모조리 막겠다는 기세다. 법제사법위와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등에서 수사 착수부터 재판, 심지어 언론까지 손댄다.
수사검사들을 수사 대상으로 삼으려 하면서 무고죄로 처벌한다고 으를 뿐만 아니라, 수감된 피의자를 수사할 땐 검사실로 부를 게 아니라 검사가 교정시설로 가라고 못 박으려고까지 한다. 법왜곡죄로 판검사를 옥죄고 판검사 탄핵소추안을 흔들어 보이며 판사선출제로 판사들을 솎아낼 기세다.
더 나아가 특정인에 대한 표적 수사를 금지하자는데, ‘특정인’에 대한 수사를 무조건 표적 수사로 여기는 이들인지라 ‘특정인’을 수사하지 말라는 입법이나 다름없다. 50인의 발의자 중에 이건태·양부남·김동아 의원 등 이른바 ‘대장동 변호사’도 있다. 현행법으론 변호가 어렵다는 실토인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그나마 이건 대부분 발의 단계다. 과방위에선 민주당이 아예 방송3법 등을 일방 처리했다. 법안소위로 넘기는 시늉조차 안 했다. 사실상 방송 지배구조에 자기 쪽 사람들을 넣겠다는 건데, 자신들이 여당일 땐 거들떠보지도 않던 법안이다. 공교롭게 “언론이 검찰의 애완견”이란 이 대표의 거친 발언에 언론단체들이 한목소리로 반발한 바로 다음 날 강행했다. 여론전에서도 밀릴 수 없다는 심정인 듯한데, 옹졸하고도 옹색하다.
오랜 세월 민주당 그 자체였던 DJ는 이렇지 않았다. ‘김대중 당원’이 전체 당원의 80%였다는 시절이었는데도 그렇다.
이 대표는 비교적 단기간에 DJ 이상이 됐다. 일종의 ‘신성(神性) 가족’ 수준에 도달했다.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않으며 어떤 형태로도 창설되지 않는다”는 헌법마저도 넘어선 존재 말이다. 이 대표와 그 주변을 위한 제도가 속속 만들어지려 하고 있다.
분명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평등하다. 이 대표는 더 평등하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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