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집단휴진 보니 ‘바보 의사’ 장기려가 그립다
80대 환자에게 전문의약품인 맥페란을 투약해 전신 쇠약, 발음 장애, 파킨슨병 악화 등의 피해를 준 의사가 업무상과실치상 혐의로 재판에서 금고 10월의 집행유예 2년 형을 최근 선고받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맥페란 허가 사항에는 파킨슨병 환자 등에게 투여하지 말라고 명시돼 있다. 그런데 이 의사는 80대 환자의 파킨슨병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법원은 판단했다. 임현택 의사협회 회장은 이번 판결을 한 판사에 대해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비하성 발언을 SNS에 올렸다. “구토 환자에게 어떤 약도 쓰지 마세요”라며 일률적인 치료제 사용 중지를 주문하는 글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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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으로 의사들에게 독점권한 부여
권한 상응하는 책임감 보여줘야
아픈 환자 곁으로 일단 돌아오길
」
만약 의사가 환자에게 파킨슨병 등 투약 금기 사항이 있는지 확인하고도 맥페란을 쓰겠다는 의학적 판단을 하고, 환자에게 이유를 잘 설명해 동의받아 투약했다면 의료계의 주장도 수긍할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식약처 허가 사항에서 파킨슨병 환자에게 투여하지 말라고 명시한 금기 사항을 확인조차 안 한 사안을 놓고 위와 같이 주장하니 설득력이 떨어진다.
맥페란은 의사만 처방할 수 있는 약사법상 전문의약품이다. 현행법이 국민 보건을 위해 의사에게 독점권을 부여했으니 의사에겐 그에 걸맞은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주의 의무가 있다.
파킨슨병 환자에게 사용하면 안 된다고 식약처 허가 사항에 명시된 약을 80대 노인 환자에게 주사하기 전에 파킨슨병이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는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은 파킨슨병 환자가 있겠나. 판사에 대한 비하성 발언이나 일률적인 치료제 사용 중지 요청 등이 국민 눈높이에서 적절한지 의문이다. 13만 개업 의사들이 참여하는 의사협회는 대한민국 법이 의사들에게 부여한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감 있는 자세를 가져야 마땅하다.
법은 의사에게 의료에 관한 광범위한 독점 권한을 주면서 동시에 여러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의사(醫師)란 단어에 ‘스승 사(師)’가 들어 있는 것처럼 의사는 환자에게 매우 중요한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의술을 베푼다. 환자는 의사를 존경하고 의사의 수고에 감사한다. 모든 국민은 누구나 환자가 될 수 있고 가족이 아프면 환자의 가족이 될 수 있다. 가족이 아플 때 기댈 곳은 ‘의사 선생님’이다.
의사들과 정부의 ‘의정(醫政) 갈등’이 장기화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정부는 지난 4일 전공의가 병원으로 복귀하는 데 걸림돌이 없도록 할 것이고, 복귀하면 기존 행정처분 절차를 중단해 법적 부담 없이 수련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승적 차원에서 관용을 베풀겠다는 취지다.
그런데도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지난 17일부터 무기한 휴진에 들어갔고, 세브란스병원 교수들도 오는 27일부터 휴진을 예고했다. 참여율은 저조하지만, 의사협회의 강행 결정으로 일부 개업의들이 18일 휴진했고, 오는 27일부터는 무기한 휴진을 예고했다.
제중원(濟衆院)은 1885년(고종 22) 개원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자 우리나라 현대 의학의 발상지다.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은 제중원이 각자 자기 병원의 효시라고 주장한다. 안락한 삶을 버리고 조선으로 건너와서 제중원에서 서양 의술을 베풀고 가르쳤던 알렌·헤론·에비슨 등의 희생과 봉사 정신을 생각한다.
의사협회의 휴진 투쟁을 보면서 ‘바보 의사’ 장기려(1911~1995·사진 왼쪽) 선생도 떠올려 본다. 그는 외과 의사로서 평생 낮은 곳에서 청빈한 삶을 살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65년간 인술을 베풀었다.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자기 돈으로 수술해준 그는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대병원 이사장을 겸하는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지난 10일 서울대 의대와 서울대병원 구성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교수님들이 휴진 의사를 보류하고 의료 현장을 지키는 일을 우리는 굴복이 아니라 희생으로 생각한다”고 설득했다. 말기 암 환자들이 포함된 90여 개 환자단체가 눈물로 집단휴진 철회를 호소했다. 정부는 의료계가 진정성 있는 대화를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자는 제안을 한 상태다. 의사들은 막말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아픈 국민을 위한 ‘의사 선생님’ 자리로 하루 속히 돌아와야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성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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