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교수가 ‘관계자외 출입금지’ 내건 까닭 [김성탁의 시선]
명예교수인 지인과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했다. 은퇴 후 근황을 묻는 말에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 한장을 보여줬다. 아파트 방문에 다이소에서 샀다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스티커가 붙어있는 사진이었다. 그가 혼자 쓰는 방인데 수많은 책이 꽂힌 책장과 컴퓨터, 침대 등이 놓여있었다. 간소하게 자신만의 공간을 꾸민 모습이었다.
은퇴 후 부부끼리 사는데 그래도 긴 세월을 함께한 부인이 보면 서운해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부인도 자신을 ‘관계자’라고 농담처럼 부르며 개의치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다. ‘출입 금지’를 내건 이유는 노후에 각자의 취향을 존중하며 좋아하는 일을 편하게 하기 위해 생각해 낸 위트였다고 한다.
이 교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여가 생활 역시 캠핑을 선호하고, 산악자전거 등을 가져가 타는 것을 즐긴다. 부인의 취향은 달랐다. 동호회에 가입해 탁구를 하는 등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활동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올 초 발표된 조사를 보면 한국 사람들이 개인주의적 생활 패턴을 선호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글로벌 가구업체 이케아가 38개국 소비자를 설문 조사한 ‘2023 라이프 앳 홈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응답자의 40%가 ‘집에서 홀로 있을 때 즐거움을 느낀다’고 답했는데, 조사 대상국 중 1위였다. 반대로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웃는 시간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응답은 14%로, 조사 대상국 중 가장 낮았다. 이 항목에서 아일랜드는 무려 43%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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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향대로 즐거운 삶 살자는 의미
콜라텍이 성지, 복지관 커플 등장
길면 50년… 브라보! 인생 후반전
」
하지만 은퇴 교수 부부의 생활상이 이런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여겨지진 않았다. 여러 명의 자녀를 함께 키워낸 후 시간적 여유가 많아진 만큼 은퇴 시간을 부부가 각자 편하게 원하는 삶을 사는데 쓰자는 암묵적 합의가 스티커에 담겨 있었다.
이런 공감대 때문인지 식사를 해결하는 데에도 규칙이 있었다. 이들의 경우 식사 준비를 부인이 전담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일단 아침은 매우 간단하게 해결한다. 이때도 각자 취향대로 한다. 남편인 교수는 빵에 치즈 정도를 얹어 간단히 먹지만, 부인은 빵에 좋아하는 여러 내용물을 가득 넣어 즐긴다. 각자 일정을 보내고 저녁을 함께할 때면 단골 식당 예닐곱 곳 중 골라 외식을 한다고 했다.
이들의 은퇴 생활에서 또 눈여겨볼 점은 지출 구조조정이다. 공공기관의 장을 지낸 이 교수는 은퇴 전 골프를 즐겼다. 하지만 한 번에 수십만 원이 드는 골프를 중단하다시피 했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나 회원권이 있어 비용이 적게 드는 이들과 가끔 친다. 대신 부부 모두 큰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건강을 지키고 즐거움을 안겨주는 활동에 주로 시간을 쓰고 있었다.
요즘은 대기업 임원을 해도 50대 초반에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100세 시대’라서 은퇴 후 길면 50년이 남아있는데, 장·노년층의 삶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 콜라텍은 술이 허용되지 않는 10대들이 콜라를 마시며 춤추고 이성을 만나는 장소였다. 지금은 서울 제기동과 청량리 일대에서 성업 중인데, 고객층의 연령대가 확 뛰었다. 중년에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이곳에서 함께 춤을 추며 활력을 찾는다. 혼자 연습하는 이들도 많고, 지팡이 짚고 온 80대까지 흥겨운 음악에 몸을 흔든다고 한다. 탈선의 장이 아니라 여가 공간이 된 것이다.
젊은이들이 PC방에서 음식을 시켜 먹으며 게임을 하듯 나이 든 분들은 이곳에서 저렴한 가격에 끼니를 해결한다. 바둑이나 장기를 모여서 두는 장소까지 주변에 생겨나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역이 ‘고령층의 강남역’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사별 후 혼자 남은 고령층이 사회복지관 등에 다니는 경우도 흔하다. 이곳에서 마음에 맞는 이성을 만나 교감을 나누기 때문에 'BC'(복지관 커플)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오래 배우자의 병시중을 드는 이들 역시 함께 차나 커피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관계를 맺는 활동만으로도 위안과 활력을 얻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공동체적 질서가 강했던 한국이 개인 중심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우리는 초고령화 사회를 맞고 있다. 자녀 양육에 올인하는 문화가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관계자 외 출입금지’ 스티커는 이제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음을, 부부 사이에 협력과 자율이 정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 같았다. 시기의 다름은 있겠지만 은퇴는 누구에게나 닥쳐올 미래다. 재산이 많고 적음을 떠나 각자 좋아하는 것을 골라 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응원한다. 바야흐로 ‘브라보 인생 후반전'이다.
김성탁 기획취재2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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