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모서리를 접는 마음] 니불나불
한국문학번역원의 해외 교류 공모 사업 지원을 받아 뉴욕에 갔다. 행사가 끝난 후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리지 뷸러(Lizzie Buehler)의 의대 진학 소식이었다. 리지는 내 소설 세 권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인데, 현재는 병원에서 스크라이빙(회진 기록 업무)을 하고 있고, 곧 의대에 입학할 거고, 첫 소설 원고도 출판사에 넘겼다. 한 몸으로 이게 가능한가? 나는 리지가 둘이라고 말했다. 오늘은 리지A가 왔다고. 그러자 리지가 “리지B가 번역을 계속할 거예요”라고 덧붙여 모두를 즐거운 경악 속으로 빠뜨렸다. 다음날 나는 리지에게 정말 교대로 활동하느냐고 물었다. 농담이었지만, 더 알고 싶어서였다.
“잠을 매일 9시간씩 잘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암벽 등반도 하고, 뜨개질도 해요. 친구도 있어요.” 친구도 있다는 말에 우리는 와르르 웃었다. 지금은 절친과 같은 집에 사니까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고 리지는 말했다. 그러면서 휴대폰의 메모를 보여주었는데 죄다 한자뿐이었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각각의 한자 중에 유사성이 있는 것들을 모아둔 조합이었다. 발음, 뜻, 형태 중 하나가 비슷하면 시작되는 컬렉션. 리지는 중국어, 스페인어, 에스페란토어까지 끊임없이 배워온 사람인데 그 원초적 동력을 잠시 엿본 듯했다. “이거 혹시 비밀인가요? 리지 만의 비법?” 그러자 리지의 대답. “모두에게 추천하는 놀이예요!”
그 영향일까? 마트에 붙어있던 ‘No Nibbling’도 좀 다른 느낌으로 눈에 들어왔다. 맛보지 말라는 뜻이겠지만 어쩐지 ‘니블’이라는 영어가 비슷한 운율의 한국어 ‘나불’을 연상시켰다. 입을 가볍게 놀린다는 의미의 ‘나불거리다’ 말이다. 니블-나불, 노 니블링-노 나불링. 그게 내 첫 컬렉션. 어쩌면 이 언어에서 저 언어로 오갈 때 통행의 자유이용권 같은 것이 바로 이런 ‘말 놀이’일지도 모르겠다.
윤고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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