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골프 벌타처럼…바둑도 몰수패 말고 ‘유연한 룰’ 없을까
지지옥션배는 40세 이상 시니어기사와 여자기사 각 12명이 대결한다.
최규병 9단과 조혜연 9단이 맞붙은 지난 주의 2국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시간에 쫓긴 최 9단이 급히 둔 수가 공교롭게 ‘네모’에 떨어졌다. 바둑은 선의 교차점에 착수한다. 교차점이 아닌 네모 안은 착수금지 구역이다. 물론 그 돌의 목표가 어디인지는 모두 안다. 최 9단도 돌의 위치를 수정했고, 두 사람은 대국을 이어갔다. 한데 곧 심판이 찾아와 최 9단의 반칙패를 선언했다. 판을 잘 이끌어 크게 우세했으나 순식간에 패자가 됐다.
바둑 룰은 엄격하다. 뭔가 잘못되면 벌칙은 딱 하나, 몰수패다. 바로 승부가 결정 나기 때문에 예전엔 상대방조차 못 본 척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심판도 대국자가 어필하면 비로소 조치를 취했다. 하나 지난해 상임심판 제도가 생기면서 룰 적용은 더 삼엄해졌다.
반칙패는 2000년 이후 32번 일어났다. 패싸움 도중 패감을 쓰지 않고 패를 때린 경우와 사석을 들어내다 벌어진 반칙패가 가장 많다. 착수 전에 시계부터 누른 케이스도 있다.
바둑은 오랜 세월 심판이 필요 없는 예도의 게임을 자부했으나 알고 보면 룰이 매우 복잡하다. 규정집도 책으로 한 권이다. 예전 관철동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 K기사와 H기사가 대국하는데 K는 슬슬 화가 치솟았다. 자신이 상당히 유리했는데 후반 실수로 그만 바둑이 불리해진 것이다. K는 상대가 당연히 던져야 할 상황인데 던지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부글부글 화를 끓이다가 이윽고 자신의 돌을 죽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을 메우고 또 메워 모조리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돌이 다 죽은 뒤에도 K의 착수는 계속됐다. 구경하던 기사들도 밤이 깊어지자 다 떠나가고 주위는 적막해졌다. H는 둘 곳이 없어지자 기원에 문의했다. 이런 경우는 어떡하느냐. 잠시 후 직원이 답을 가져왔다. “착수 포기가 가능합니다.”
K가 돌을 놓으면 H는 “착수 포기”라고 말하는 이상한 광경이 반복됐다. 나도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그때의 광경은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다. 예전엔 많이 불리하면 돌을 던지곤 했다. 하나 요즘 중국 기사들은 공배까지 다 두고 계가 직전에 돌을 던진다. 그 바람에 실제로는 반집패인데 불계패로 기록된다. 처음엔 몹시 이상했으나 바둑이 ‘스포츠’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게 스포츠다. 중도 포기란 있을 수 없다.
하나 관철동 시절만 해도 돌 던지기는 바둑이 가진 덕목의 하나였다. 시합 후 얼굴을 붉히며 “상대가 던지지 않는 바람에 졌다”고 말하는 기사가 많았다. 하나 고수 중엔 그런 말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고수는 승부에 관한 한 핑계를 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한국기원에 ‘착수 포기’란 규정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전의 착수 포기는 어디서 나온 걸까. 난관에 봉착한 직원의 임기응변이었을까. 문득 실소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한국리그 의정부 팀에 용병으로 참여한 양카이원 9단은 사석 7개 중 6개만 들어내고 시계를 눌렀다가 반칙패를 당했다. 팀도 패배하면서 포스트시즌 희망도 사라졌다. 마지막 사석을 들어내기 직전 그의 시계는 1초가 남아있었으니까 다 들어냈으면 시간패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사석이 20개쯤 되면 20초 초읽기에서 감당이 될까. 사석을 들어낼 때 시계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다는데 한국 기사도 잘 모르는 규정을 중국 기사가 알 리 없다.
바둑이 스포츠가 된 이상 룰을 좀 완화했으면 좋겠다. 모조리 몰수패로 끝낼 게 아니라 축구의 페널티킥이나 프리킥, 또는 골프의 벌타처럼 적당한 벌칙을 부과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흐르면 정답도 변한다. TV나 인터넷으로 구경하는 팬들을 생각해도 갑자기 승부를 끝내는 건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든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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