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네산맥 넘던 날, 팔등에 소름이 돋았다
[김진우]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 루트를 걸었다. 갑자기 생긴 5월 한 달을 어찌할까 고민 끝에 내린 다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걷기 좋다는 4~5월 중 4월은 이미 다 간 이후였고, 이래저래 완주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일단 걸어서 갈 수 있는 만큼 가다가 중간에 버스를 타고 산티아고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 아닌 데다, 올 2월 말 허리를 다친 경험, 잊을 만하면 속을 섞이는 무릎 때문에 며칠은커녕 하루 만에 포기할 수 있다고 편하게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별 탈 없이 780km 중 440km를 걸었다. 지금 생각해도 무릎뼈가 쪼개질 것 같은 통증에 두려웠던 가파른 내리막길, 걷기 시작한 지 2시간이 넘어가면 산이라도 짊어진 것처럼 느껴지던 6kg짜리 배낭과 어린아이를 하나씩 매달고 걷는 것 같은 종아리의 무게를 어찌 견뎠을까 싶다. 특히 생장피에드포트(St. Jean Pied de Port)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론세스바에스(Roncesvalles)로 가는 나폴레옹 길의 12시간 코스를 돌이켜 보면 그 길을 넘은 게 진짜 내가 맞나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나는 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었을까?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내가 만났던 외국인들은 주로 정년 퇴임 이후, 평생을 가족 혹은 일을 위해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다른 것, 특히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큰 병을 이겨낸 이후 온 사람도 있었다. 내가 만났던 한국인들 중에는 가족, 배우자, 연인, 반려동물과의 사별, 이별이라는 "큰일"을 겪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젊은 친구들은 직업, 진로, 미래에 대한 고민 끝에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유럽인들은 완주보다는 나처럼 기간을 정해두고 걷는 사람이 많았고, 한국인들은 100% 완주를 목표로 했다. 한국에서부터의 거리, 비용, 여건 등을 고려할 때 당연한 일이다.
나의 경우 연구학기 중 어쩌다 보니 5월 한 달이 주어졌다. 오래전 책모임 친구들과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얘길 나눴고 책을 찾아 읽었는데, 읽고 나서 오히려 포기했다. 한국 사람들, 특히 단체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왠지 싫었고, 몇몇 유명인이 쓴 책과 SNS에서 보이는 순례길의 모습이 내 기대와 달랐다.
하지만 나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의 일부를 걸었고, 또 가겠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누군가가 노하우를 물어 온다면 짧은 경험이나마 성실하게 답해 주고 싶다. 예상대로 순례길에는 한국인 단체 여행객이 많았고, 화려한 메이크 업을 하고 인스타그램으로 생중계를 하며 걷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을 볼 때마다 잠시 머리가 복잡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다양한 이유로 행복했다. 순례길을 마친 다음, 내가 행복했던 순간을 정리해 봤다. 쓰다 보니 하염없이 길어져서 일단 4가지만 소개한다.
▲ 거리는 25km지만 올라야 할 해발 고도가 1400m인 첫 날 나폴레옹 코스. 순례길에 다시 나선다 해도 이 코스만큼은 피하고 싶다. 하지만 한반도의 남쪽에 사는 사람으로서 국경을 넘은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팔등에 소름이 돋는다. |
ⓒ 김진우 |
프랑스 루트는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트에서 출발한다. 첫날, 거리는 25km지만 올라야 할 해발 고도가 1400m다. 길바닥에 코를 박을 것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끝도 없이 올라가야 한다. 순례길에 다시 나선다 해도 이 코스만큼은 피하고 싶다. 만약 이 길을 또 걷기로 결심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 걸어서 국경을 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출발한 나는 12시간을 걸어 스페인에 도착했다. 언제 어느 순간에 내가 스페인으로 넘어왔는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같은 길, 산, 나무, 함께 걸었던 순례자들이 있었다. 론세스바에스에 도착했을 때 친구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축하했다. 그 순간 우리가 국경을 넘어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분단된 나라의 남쪽에 위치해 섬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온 나만이, 안 그래도 터질 것 같은 가슴에 혼자만의 이유까지 껴안고 훌쩍거렸다.
기차로, 자동차로, 버스로 국경을 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걸어서 내 나라의 국경을 넘는다는 것, 한반도에 살고 있는 7800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남한에 살고 있는 50대 후반인 나에게는 불가능, 전쟁, 죽음, 감옥 등의 단어가 생각난다. 나는 지금도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그날을 생각하면 팔등에 소름이 돋는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국경이 어떤 곳에서는 가족을 생이별하게 하는 철벽이 되고, 그게 70년이 넘도록 여전히 남아 누군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못 본 척하며 분단과 갈등에서 떨어지는 단물을 빨아먹는 국내외 세력이 있는 곳이 내 나라라는 걸 역설적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동서독 분단 시절을 기억하는 독일 친구들, 최근 브렉시트를 통해 다른 이유로 국경을 인식하기 시작한 영국 친구들과 내 첫날의 감정을 나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국적, 인종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공통된 관심사를 통해 몇 시간 만에 끈끈한 연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시 순례길을 떠난다면 포르투갈 루트를 선택하고 싶다. 100km라 5일이면 걸을 수 있고, 바다를 끼고 있으며, 프랑스 루트보다 훨씬 조용하다는 다양한 매력에 더해, 걸어서 포르투갈과 스페인 국경을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작은 수도원에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음료수와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 그들은 대부분 한 때 순례자였다. 자신이 받았던 환대를 잊지 않고 돌아와 또 다른 환대를 베풀고 있다. 순환의 고리를 크고 넓게 만들어 순례길의 기운을 청정하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이 여전히 가장 대중적이라면, 그 이유는 환대의 순환이 만들어 낸 기운 때문이라 확신한다. |
ⓒ 김진우 |
보통 하루에 20km에서 30km를 걷는다. 나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출발해 6~7시간을 걸어 다음 숙소에 도착했다. 대부분은 4km마다 작은 마을이 있어 그곳에서 아침, 점심을 먹으며 쉬고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10km가 넘도록 마을이 없는 코스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자원봉사자들. 작은 수도원일 수도 있고 푸드 트럭일 수도 있다.
그들은 커피, 오렌지 주스, 바나나, 크루아상, 샌드위치 등 순례자에게 필요한 음료수와 먹거리를 제공하고, 우리는 각자 원하는 만큼 기부한다. 그들이 없다면 순례자들은 안 그래도 무거운 배낭에 간식까지 싸 들고 걸어야 한다. 평소라면 별 것 아닐 작은 음료수 하나, 샌드위치 하나가 2~3시간 뒤 얼마나 무섭게 무거워지는지, 나중에 배가 고파지더라도 일단은 먹어서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그런 순례자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적재적소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마을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성당, 그곳에도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성당 입구에서 안내하는 사람, 미사 시간에 오르간 반주를 하는 사람, 기타 연주를 하며 성가를 부르는 사람 등, 그들은 대부분 한 때 순례자였다. 자신이 받았던 환대를 잊지 않고 돌아와 또 다른 환대를 베풀고 있다. 순환의 고리를 크고 넓게 만들어 순례길의 기운을 청정하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우리나라 제주의 올레길, 일본의 구마노 고도(熊野古道)를 비롯해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아름다운 길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여전히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길이 가장 대중적이라면, 그 이유는 환대의 순환이 만들어 낸 기운 때문이라 확신한다. 나도 언젠가 그 길의 한 모퉁이에서 내가 받은 환대를 순환시키고 싶은 새로운 계획을 갖게 되었다.
- 2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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