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빈자리 [조남대의 은퇴일기(54)]
코로나의 어둠에서 벗어나 봄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오자, 인천공항은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듯 활기를 되찾았다. 아내도 분주한 사람들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내 마음도 고삐가 풀린 듯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어디론가 벗어나고 싶어 날개를 달았다.
한 달 전쯤에 아내가 동료들과 열흘간 해외여행을 간다는 말을 하였다. 건성으로 들어서 언제인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무심하게 지냈다. 출발일이 점점 다가오자 문간방에 커다란 캐리어를 펼쳐 놓고 여행 준비물을 하나씩 던져 놓는 것이 아닌가. 언제 가느냐고 수시로 물어보자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또 물어보냐며, 관심을 좀 가지라고 핀잔이다. ‘내가 너무 무관심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틀을 남겨두고는 마트에 같이 가자고 하더니 자기가 없을 때 먹을 간편식을 고르라고 한다. 평소에는 건강에 좋지 않다며 사지 못하게 하더니 마음껏 골라도 아무 말 없이 챙긴다.
출발 전날이 되자 밥을 한 솥 하여 조그만 전자레인지 전용 그릇에 담아 냉동실에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 한 달은 족히 먹을 양이다.
장조림, 깻잎 김치, 취나물 무침, 마늘종 요리 등을 담은 그릇마다 명찰을 부착하여 냉장고에 넣어두며 온종일 요리하느라 고생했다며 공치사를 한다.
혼자 떠나는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애쓰는 마음은 알고 있지만, 고마움보다 무엇인가 잃어가는 듯한 서운함이 앞서니 어쩌겠는가.
집 근처에서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는 공항버스 시간이 애매하다며 투덜거린다. 조금 일찍 가는 버스를 타면 거의 한 시간을 공항에서 기다려야 하고, 다음 버스는 아슬아슬하다고 걱정을 한다. 며칠을 모른 척 지나자 ‘친구는 남편이 공항까지 태워주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스쳐 지나가듯 한다. 태워달라는 것보다 더한 압력으로 느껴진다. 혼자 공항버스를 태워 보냈다가는 어떤 앙갚음이 되어 돌아올지. 결국, 공항까지 태워주겠다고 하자 화사하게 웃으며 고맙다는 말을 연발한다. 열흘 동안 혼자 챙겨 먹을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좋지만은 않아 무덤덤한 표정으로 공항으로 향했다. 이런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온갖 이야기를 걸며 애쓰는 모습에 스르르 마음이 풀린다.
친구들과 열흘 동안 홀가분한 기분으로 떠나면서 아내는 ‘이제 나 없이 고생 좀 해봐라’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동안 잘 챙겨 주었는데도 자기한테 고맙다는 표현도 없이 살갑지 않은 무심한 사람이었으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으리라. 이런 남편이 자기가 없는 동안 아내의 소중함을 깨닫고 앞으로는 좀 더 잘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가끔 “친구들은 남편이 은퇴 후에 요리도 하고 청소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집안일을 하는데 당신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라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요즈음에는 세탁기도 돌리고, 식사 후 설거지도 가끔 한다. 내 딴에는 이만하면 됐지 않나 하는 자부심을 느끼면서 재활용 쓰레기까지 도맡아 버리곤 한다.
여행 중에 나름대로 멋지게 찍은 사진을 보내오기도 하고 잘 지내는지 안부도 물어 온다. 며칠 지난 후 카톡으로 “스트레칭 수업 잘 다닌다고 듣고 있어요. 최고입니다.ㅎㅎ”라는 문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매일 아침 아파트에서 함께 하던 단체 스트레칭 수업을 빠지지 말고 잘 다니라고 당부하고 갔었다.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내가 잘 다니고 있는지 확인해 본 모양이다. 아내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내가 쳐 놓은 거미줄과 레이더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 같아 씁쓸하다. 여자의 촉과 곁눈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움츠리는 것이 장수의 비결임을 새삼 깨닫는 중이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갖가지 간편식과 잔뜩 해 놓은 밥과 반찬을 꺼내먹는 것도 슬슬 지겨워져 냉장고 문을 여닫는 것이 짜증스러워진다. 며칠 지났다고 벌써 아내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이 그리워지는 것인가. 떠나고 없으면 마냥 자유롭고 즐거울 것 같았는데 돌아올 날이 며칠 남았는지 달력을 자꾸 쳐다본다.
“아버님 뭐 하세요?”. 며느리다. 의아하면서도 어딘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스친다. “아침 먹고 커피 한잔한 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오늘 점심시간쯤에는 어떤 일 있으세요?.” “2시 약속 이외에는 별일 없는데”. “그럼 점심같이 하실래요?” 반갑고 고맙다. 혼자서 끼니 챙기느라 고생하는 내가 걱정되어 그런 것 같다. 서로가 편리한 광화문전철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늦을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진다. 시아버지와의 식사 자리가 부담스러울 텐데도 전화해주다니. 곧이어 청순한 얼굴에 웃음을 띠며 나타났다. 짧은 머리를 하여 앳되고 아가씨 같아 보인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은 나이 짐작하기가 어렵다. 아기 엄마인지 아가씨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며느리도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시아버지와 단둘이 점심 먹는 것이 어색할까 봐 친정어머니도 같이 모셨다. 사부인 과는 허물없이 가끔 보는 사이라 분위기가 훨씬 부드럽다. 배려가 고마울 따름이다. 근처의 한정식집에서 식사하고 카페로 옮겨 커피를 마시며 덕담이 오가는 중에 며느리는 나중에 우리와 함께 살겠다고 한다. 가슴 깊이 와닿는다. 먼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몰라도 말만 들어도 반갑고 고맙다. 나이 드신 어머니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요양원에 모신 내가 과연 며느리의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전에도 한 번 들은 적이 있었지만, 다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 고맙다. 한편으로는 ‘네가 아직 나이 드신 부모님과 살아보지 않아 그런 이야기 하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기분이 좋아 무언지 모를 작은 파동들이 내 마음의 호수에 잔잔히 번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동안 느긋한 일상의 여유와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부부란 함께 있을 때는 자유를 꿈꾸지만, 떨어져 있으면 그 빈자리가 절실히 느껴지는 존재인가 보다. 여행 기간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하느님께서 왜 아담의 갈비뼈를 빼 이브를 만들어 주셨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다가온다. 다행히도 며느리가 아내의 부재를 잠시나마 채워주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내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을 텐데.
조남대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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