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달라지고 있다... '극우 승리' 속에 감춰진 기류
한국은 물론 국제 정치를 보면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정치를 바라보는 작은 'tip'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박민중 기자]
▲ 지난 8일, 현 이탈리아 총리인 멜로니(G. Meloni)가 로마에서 유럽의회 선거에 참여하고 있다. |
ⓒ 로이터통신/연합뉴스 |
투표에 참여한 국가는 27개국,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는 3억 7300만 명, 투표로 선출되는 의원은 720명. 규모로 보면, 이 선거는 인도 총선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민주주의 선거다. 그러나 인도 총선과 달리 이 선거는 유럽 전역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이 특정 국가의 경계를 넘어, 유럽을 대표하는 의회 의원을 선출한다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세계 유일의 다국적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을 선출하는 제10회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 선거가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었다.
▲ 9대(2019-2024) 유럽의회 정당별 의석 분포현황 (출처: European Parliament) |
ⓒ European Parliament |
그다음은 진보적 정당인 녹색당(The Greens)이 71석을 보유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유럽보수와개혁(ECR)과 정체성과민주주의(ID)이 동일하게 64석을 기록했다. 두 정당은 유럽회의론에 기반한 극우정당으로 분류되고 있다. ECR에 현 이탈리아 총리인 멜로니(G. Meloni)가 소속되어 있으며, ID는 프랑스의 오랜 극우정당의 리더인 르펜(M. Le Pen)과 최근 독일의 극우정당으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독일 대안당(AfD)을 포함하고 있다(그러나 지난 5월, 독일 대안당 소속 의원이 나치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문제를 야기하자 ID 정당은 AfD 소속 유럽의회 의원 9명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정리하면, 지난 9대 유럽의회 구성은 크게 3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비록 예년에 비해 의석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유럽의회 창설 이래 제1·2당 지위를 잃은 적이 없는 유럽국민당(EPP)과 사회민주진보동맹(S&D)이 굳건하게 중도를 지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녹색당(The Greens)의 약진이었다. 실제 녹색당이 지난 유럽의회에서 제4당이 되면서 유럽연합은 기후위기와 녹색경제 부문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선보였다. 셋째, 극우정당의 부상이다. 유럽의회 내에서 극우정당으로 분류되는 유럽보수와개혁(ECR)과 정체성과민주주의(ID)가 각각 64석을 확보했다. 이 두 정당을 합하면 128석으로 단숨에 제3당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10대(2024-2029) 유럽의회 정당별 의석 분포현황 (출처: European Parliament) |
ⓒ European Parliament |
그렇다면, 이번 제10대 유럽의회 구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위의 표는 지난 9일 마무리된 유럽의회 선거 결과에 따른 정당별 의석수를 나타낸 것이다. 얼핏 보면, 지난 9대 유럽의회 의석수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중도 성향의 리뉴유럽(Renew)이 102석에서 79석으로 크게 줄어들었고, 중도좌파 성향의 녹색당이 71석에서 53석으로 줄어든 반면 유럽보수와개혁(ECR)이 64석에서 73석으로 증가한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번 선거 결과로 인해, 유럽연합의 확대와 심화보다는 개별 국가 중심으로의 정책적 변화가 야기될 가능성이 커졌다. 그 이유는 소위 유럽연합주의(pro-europe)를 표방하는 정당들의 세력이 약화된 반면, 유럽연합에 비판적인 유럽회의주의(euroscepticism)를 표방하는 정당들의 세력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 유럽국민당(EPP)은 이번 선거에서 189석으로 오히려 지난 선거보다 13석을 더 확보하며 1당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러나 같은 중도로 분류되는 사회민주진보동맹(S&D)과 리뉴유럽(Renew)이 각각 9석과 23석을 잃었다. 여기에 더해 중요한 파트너인 녹색당(The Greens)마저 이번 선거에서 18석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친유럽연합주의 정책을 표방하는 이 네 정당의 의석수 비율이 9대에서는 69.9%(총 705석 중 493석)였으나, 이번 10대에서는 63.3%(총 720석 중 456석)로 감소했다.
반면, 유럽연합의 이민정책과 친환경정책 등에 강한 거부 의사를 밝혀온 극우정당들이 강세를 보였다. 먼저, 유럽보수와개혁(ECR)은 9대 의회에 비해 9석이 늘어난 73석으로, 중도정당이자 제3정당인 리뉴유럽(RenewEurope)과 6석 차이에 불과하다. 유럽의회에서 가장 극우정당으로 분류되는 정체성과민주주의(ID)는 위의 표에선 9대 의회에 비해 6석이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표에서 독일대안당(AfD)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이번 10대 선거에서 독일대안당(AfD)이 무려 15석을 얻었기 때문에, 사실상 10대 의회에서 정체성과민주주의(ID)의 의석수는 73석으로 봐도 무방하다.
결국, 유럽의회에서 극우정당으로 분류되는 이 두 정당은 각각 73석을 기록하면서, 이 두 정당의 의석수는 무려 146석으로 사회민주진보동맹(S&D)을 꺾고 제2당으로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RN) 당수 마린 르펜이 유럽의회 선거 마지막 날인 지난 9일 연설하는 모습. |
ⓒ AFP/연합뉴스 |
이러한 배경에서, 거의 모든 언론은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를 두고 단순히 '극우 정당의 약진'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다. 마치 유럽의회 또는 유럽연합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이 같은 보도는 단순히 유럽의회 내 극우 정당의 의석수를 넘어, 개별 국가의 국내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프랑스의 경우, 유럽 내에서 극우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유럽의회 선거 역사상 처음으로 프랑스 단일정당 득표율에서 30%를 돌파했다. 이는 현 프랑스 대통령인 마크롱이 소속된 중도 성향의 르네상스당보다 무려 2배 가까이 높은 지지율이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유럽의회 선거가 끝나자마자 의회를 해산하고 오는 6월 말 조기총선이라는 카드를 던졌다. 이탈리아의 경우, 조지 멜로니 현 총리가 소속된 이탈리아형제들(FdI)이 2019년 선거에서는 6% 득표율에 그쳤으나, 이번에는 29%를 기록했다. 무려 5배 가까운 성장세를 보인 것이다. 이탈리아형제당(FdI)은 유럽의회에서 유럽보수와개혁(ECR)에 소속된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이 같은 극우정당의 약진은 오히려 유럽연합이 실제 유럽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하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동안 유럽연합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민주적 정당성의 결핍(democratic deficit)을 해소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에서 시작된 유럽연합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맥락과 정치적 구조에서 기인한다. 쉽게 말해, 유럽연합은 개별 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라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학자들은 유럽연합을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행위자라고 주장한다. 유럽연합은 개별 국가와 같이 유럽 시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세금을 걷거나 자체적인 유럽 군대를 보유하고 있진 않다. 그러나 사법부에 해당하는 유럽사법재판소(ECJ),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유럽중앙은행(ECB), 행정부와 입법부의 역할을 하는 유럽연합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가 있다. 그리고 1979년부터는 유럽 시민들의 직접 선거로 구성되는 입법부인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도 있다. 이에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보다는 훨씬 국민국가적 성격과 구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비록 최근 유럽의회가 유럽정치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나, 유럽연합의 발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기구는 고위관료 또는 기술관료로 구성된 '유럽연합집행위원회'와 각 국가의 외무장관 또는 정상으로 구성된 '유럽연합이사회'였다. 이에 한동안 유럽정치의 핵심은 이 두 집단의 줄다리기가 핵심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과정에서 실제 유럽 시민들의 의사는 사실상 배제되는 경향이 강했다.
즉, 선출되지 않은 관료로 구성된 유럽연합집행위원회와 몇몇의 국가 정상들로 구성된 유럽연합이사회가 모든 결정을 하면서도, 실제 그 결정에 영향을 받는 유럽 시민들의 의사는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이 때문에 유럽연합을 두고 '관료적 괴물 집단'(bureaucratic monster)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실제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 정당들이 약진한 이유에 대해 독일 출신의 아이크하우트 유럽 녹색당 후보는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의 많은 유권자들은 EU가 일반 시민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점차 유럽의회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각국의 정상들은 물론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 관료들이 유럽 전역에 있는 유권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유럽의회 선거 투표율 역시 1979년 초대 선거에서는 61.99%였지만 선거를 거듭할수록 투표율이 감소하면서 2014년 8회 선거에서는 42.61%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지난 9회 선거에선 50.66%, 이번 선거에서는 51.08%로 9회 선거보다 근소하게나마 높아지는 등, 다시 투표율이 상승하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나아가 몇 차례 유럽조약이 개정되면서 유럽의회는 유럽연합의 예산 감독권을 포함해 여러 권한을 보유하게 되었다. 유럽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관료인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의 인준 또한 그 권한 중 하나다.
이에 현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연임을 위한 인준을 받기 위해 극우정당인 이탈리아형제당(FdI) 소속인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와 연정까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전 같으면 중도 진영의 연정만으로 충분히 인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극우정당의 의석수를 무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선출한 유럽 시민들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기류는 유럽연합의 실제 정책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에 따르면, 유럽의회 선거 직후 유럽국민당(EPP) 내부에서 2035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 신차 판매를 금지하기로 한 정책의 재검토를 거론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선거 이전부터 유럽보수와개혁(ECR)을 중심으로 유럽연합의 환경정책 후퇴를 요구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 지난 9일, 폰데어라이엔 현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가운데)이 벨기에 브뤼셀의 당사에서 유럽의회 선거 결과를 듣고 환호하고 있다. |
ⓒ AP/연합뉴스 |
결론적으로 이번 2024년 유럽의회 선거는 결과적인 측면에서는 극우정당의 약진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유럽연합의 역사적 맥락과 정치기구의 구조적 특징을 고려할 때, 정치적 옳음의 문제를 떠나 민주주의의 제도적 관점에서 유럽연합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앞으로 유럽연합과 유럽의회에게 주어진 숙제는 얼마나 민의를 잘 담아내느냐, 그리고 무소속을 포함한 8개 정당들이 얼마나 타협의 정치를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
"유러피언 드림은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 내의 관계를,
동화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을, 부의 축적보다 삶의 질을,
무제한적 발전보다 환경 보존을 염두에 둔 지속 가능한 개발을,
무자비한 노력보다 온전함을 느낄 수 있는 심오한 놀이(deep play)를,
재산권보다 보편적 인권과 자연의 권리를, 일방적 무력 행사보다 다원적 협력을 강조한다."
(제러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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