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눈여겨 본 이야기 영화화한 '매드맥스' 감독
[김성호 기자]
갈망(渴望). 목마를 때 물을 구하듯 간절히 바라는 마음.
영화는 바로 그 갈망으로부터 출발한다. 수천 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이제는 전설이 된 이야기와 인물 사이를 오가며, 인간의 이해가 닿지 않는 세계까지를 넘나들며 감춰진 무엇들을 풀어놓는다.
▲ 3000년의 기다림 포스터 |
ⓒ 무주산골영화제 |
삶 전체를 뒤흔드는 이야기의 힘
비결은 바로 이야기다. 그녀를 설레게 하고 꿈꾸게 하며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가장 고귀하고 즐거운 것으로 저를 이끌어가는 이야기다. 세상 모든 이야기를 좇아 온 세계를 떠돌아다닌 삶이다. 그러나 여전히 남은 이야기가 있어 그녀는 그 이야기를 갈망하며 제 삶을 기꺼이 그를 알아가는 일에 바친다. 갈증과 해갈, 바라고 이뤄짐이 반복되는 삶이 어찌 만족스럽지 않을까.
삶 가운데 비루하고 복잡다단한 사건들이 인상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이따금 이뤄지는 갈망들만 있다면야. 인간은 가끔의 행복으로도 잦은 괴로움을 견뎌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
ⓒ 무주산골영화제 |
짧은 단편이 한 편의 영화로 태어나기까지
도대체 뭐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을 수습하고 그녀는 이스탄불의 명소 그랜드 바자르를 찾는다. 수많은 물건들이 거래되는 이 시장에서 그녀의 눈길을 붙잡은 것이 하나 있으니, 다름 아닌 푸른 빛깔의 자그마한 병이다. 그녀는 이 병을 사서 호텔로 돌아와서는 그것을 닦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일어날 것이 일어나고 만다.
<3000년의 기다림>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작가 A.S. 바이어트의 단편 '나이팅게일의 눈에 비친 진(The Djinn in the Nightingale's Eye)'을 바탕으로 조지 밀러가 자유롭게 상상력을 뻗쳐나간 결과물이다. 조지 밀러가 누구인가. <매드 맥스> 시리즈로 창작력과 나이는 전혀 상관이 없단 사실을 몸소 입증한 위대한 감독이 아닌가. 그가 20년 전 눈여겨보았다는 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건 숙원과도 같은 일이었다. 2015년 할리우드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성공시킨 뒤 <3000년의 기다림> 제작에 뛰어든 것이 이를 증명한다.
▲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
ⓒ 무주산골영화제 |
<천일야화>의 현대적 재해석
알리테아가 병을 닦다 뚜껑이 열리자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요상한 무언가가 흘러나온다. 그 거대한 기운이 호텔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제법 위엄 있는 모습으로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다. 제게 등을 보이고 돌아앉은 신비하고 거대한 존재에게 알리테아가 말을 건다. 영어로, 독일어로, 또 다른 언어들로, 그러다 그리스어를 말하는 순간, 그가 반응한다.
병에서 풀려난 것은 진(이드리스 엘바 분), 앙투안 갈랑의 저 유명한 <천일야화> 속 '알라딘과 요술램프'의 지니를 연상케 하는 정령이다. 불의 기운을 빌려 빚어졌다는 정령은 영생을 살며 마법을 부리는 존재. 필멸의 인간과 삶의 어느 지점에서 교류하기는 하지만, 그와는 다른 갈망을 갖고 이 세계를 누빈다. 그 진이 알리테아의 눈앞에 나타나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 말한다. 저 유명한 '알라딘과 요술램프' 속 이야기처럼.
영화는 그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수많은 방식으로 전승돼 온 인간과 정령, 또 그가 들어주는 소원의 이야기로 화한다. 오랜 기간 이야기를 수집해온 알리테아가 소원에 대한 이야기를 모를 일 없다. 소원이 인간을 구원이며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단 것도 물론이다. 정령은 역사란 새로 쓰면 되는 것이라며 소원을 빌라 애원하지만, 알리테아는 좀처럼 그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
ⓒ 무주산골영화제 |
갈망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도록 한다
그로부터 <3000년의 기다림>은 세상 수많은 이야기보따리 가운데서도 드물게 멋진, <천일야화>를 연상케 하는 내용으로 흘러간다. 이야기꾼이라면 매혹될 밖에 없는 이야기는 무려 3000년 동안 병에 묶인 몸이 되어버린 정령 진과, 그를 깨워 소원을 빌 수 있게 된 인간의 이야기로 화한다. 이는 다시 300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만나게 되는 신화와 전설, 그리고 역사 사이의 이야기를 비집고 들어가 그 안에 담긴 어느 진실에 가 닿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오늘의 인간, 알리테아의 선택 앞에 그 모든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이르는 것이다.
저를 구한 이에게 세 가지 소원을 받아내야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는 정령과, 그에게 아무 소원도 빌고 싶지 않은 인간의 만남은 그 자체로 흥미로울 밖에 없다. 정령은 거듭 설득하고, 인간은 오로지 그에게 이야기만을 듣고자 한다. 솔로몬과 시바 여왕, 다시 오스만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 정령의 후예들과 그와 전혀 닿지 않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현실과 상상을 자유롭게 건너가며 술술 풀려나온다.
인간에게 갈망이란 무엇일까. 또 단박에 그를 이뤄주는 소원은 어떤 것인가를 조지 밀러가 관객에게 묻는다. 소원과 관련한 온갖 이야기가 망라되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또 행복해지는 이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정으로 갈망하는 무엇을 이루는 것, 그것이 과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무엇을, 갈망하는 그 상태로 남겨두는 것, 그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가.
▲ 무주산골영화제 포스터 |
ⓒ 무주산골영화제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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