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유튜브에 올라온 화제의 영상... 한국은 큰일 났다 [이봉렬 in 싱가포르]

이봉렬 2024. 6. 18.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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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렬 in 싱가포르] 유연근무제로 '저출산 고령화' 대처하는 싱가포르와 한국의 차이

[이봉렬 기자]

[기사 수정: 18일 오전 11시 5분]

유치원생 아이를 하나 키우는 부부가 있습니다. 아빠는 아침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준 후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집으로 돌아와 오전 10시부터 재택근무를 합니다. 회사는 일주일에 한두 번만 가면 됩니다. 엄마는 교통체증을 피해 아침 일찍 출근합니다. 대신 오후 4시가 되면 퇴근을 할 수 있습니다.

엄마는 지금 둘째를 임신 중입니다. 출산 후 2년 동안은 하던 업무를 다른 직원과 공유하는 방식으로 업무량을 절반으로 줄일 예정입니다. 몸이 회복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아이를 다른 데 맡기지 않고 직접 키우고 싶어서입니다. 아빠도 같은 기간 동안 업무량과 근무 시간을 조정해서 주 4일 근무를 할 생각입니다.

가상으로 꾸며 본 젊은 부부의 직장 생활인데 어떻습니까? 이런 조건이라면 큰 부담 없이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게 현실에서 가능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많은 여성이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걱정해야 하는 게 더 일반적이지요.

유연근무제 확산을 위한 싱가포르의 새 지침
 
 싱가포르 노사정 3자 협의회가 내놓은 지침안내서를 보면 유연근무제를 장소, 시간, 업무량으로 구분해 놓고, 자유롭게 설계하여 사용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 싱가포르 노동부
 
싱가포르는 지난 4월, 이같은 직장 생활이 가능하도록 근무 조건을 직원들이 자유롭게 설계하라는 지침을 발표했습니다. 싱가포르 노동부(MOM), 싱가포르 경영자 연맹(SNEF), 싱가포르 노조 총회(NTUC)로 구성된 노사정 3자 협의회(TafeP)가 발표한 유연근무제에 대한 새로운 지침입니다. 올해 12월 1일부터 싱가포르의 모든 사업체에 소속된 직원들은 본인이 원하는 근무 형태를 고용주에게 제안할 수 있고, 고용주는 수용 여부를 요청일로부터 2개월 내에 서면으로 회신해야 한다는 게 핵심 내용입니다.

싱가포르가 시도하려는 유연근무제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노사정 3자 협의회가 내놓은 지침안내서를 보면 유연근무제를 장소, 시간, 업무량으로 구분해 놓았는데, 유연근무제를 원하는 직원은 이 셋 중 하나를 고를 수도 있고, 셋을 모두 섞어서 새로운 근무 형태를 제안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빠르게 늘어났던 재택근무 혹은 원격근무는 유연근무제 중 장소에 해당합니다. 집에서 일을 할 수도 있고 직원들이 많이 사는 곳 근처에 회사에서 공유오피스를 임대해서 직원들이 쓸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외국에 거주하면서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에 사흘은 재택근무, 이틀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혼합 방식도 가능합니다.

시간을 유연하게 정한다는 건 출퇴근 시간을 개인의 필요에 의해 선택하는 겁니다. 하루에 일하는 시간 총량은 같지만, 직원들 간에 출근과 퇴근에 시차를 둘 수 있습니다. 고용주와 협의를 통해 근무시간 자체를 줄이는 것도 가능합니다.

'유연한 근무 장소'와 '유연한 근무 시간'이 결합한다면 어떨까요? 이번 지침은 그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원하는 시간대를 정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하루에 일하는 시간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고 그 총합만 맞다면 중간중간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다른 일을 보고 저녁에 다시 일을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업무량도 유연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업무량에 변함이 없다면 일하는 시간을 줄여 주 4일 근무도 가능합니다. 업무량이 시간에 연동된다면 업무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주 4일도 가능합니다. 이제껏 혼자 담당했던 업무를 제삼자와 공유하여 일을 나누는 방식도 제안이 가능합니다. 대신 업무량이 줄어드는 경우에는 급여도 함께 줄어드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의 유연근무제

싱가포르 노사정은 왜 이런 유연근무제를 모든 기업에 검토하고 협의하도록 지침을 내렸을까요? 급속히 진행되는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필요한 만큼의 노동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저 출산율을 기록 중인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싱가포르의 출산율 역시 심각한 수준입니다. 2023년 합계출산율은 0.97명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1명대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반면에 고령화는 급속히 진행되어 2030년이면 전체 인구 4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이 될 예정입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지난 3월, 현재 63세인 정년을 2026년에 64세로 연장하고 정년 이후 재고용 나이도 68세에서 69세로 조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정년 이후 재고용이란 정년을 맞은 직원도 업무실적과 본인 희망 여부에 따라 매년 재계약을 통해 고용을 유지하는 제도입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정년퇴직과 재고용 연령을 2030년까지 65세와 70세로 각각 연장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60세가 넘는 노인 세대가 유연근무제를 통해 보다 수월하게 70세까지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겁니다.

싱가포르는 은퇴 이후의 노인에 대한 대책으로도 유연근무제가 도움이 될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령화로 인해 집에 간병이 필요한 노인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유연근무제는 재택근무를 통해 노동력 확보와 간병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출산과 육아 과정에서 발생할 경력 단절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유연근무제에 대해 가장 눈여겨봐야 할 점은 유연근무를 요청하는 주체를 직원으로 한정했다는 겁니다. 유연근무제가 필요한 직원이 서면으로 요청하면 고용주는 그때부터 2개월 안에 수용 여부를 결정해 서면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지침과 함께 발표된 요청서 양식을 보면 요청 사유와 함께 유연근무제 유형, 기간, 시작 및 종료 날짜 등이 포함됩니다.

고용주는 여기에 대해 거절할 수 있으나 합당한 이유를 근거와 함께 제시해야 합니다. 지침에서 밝힌 합당한 사유는 비용이 많이 증가한다거나, 생산성이 떨어진다거나 직무 특성상 실현 가능성이 적다는 것 정도입니다. 직원이 재택근무를 제대로 하는지 믿지 못하겠다거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게 전통 또는 관습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건 부당하다고 명시해 놓고 있습니다.

유연근무제를 신청했다가 불합리한 이유로 회사에서 거절당했을 경우 회사 내부 고충 처리 절차를 통한 조정을 시도하고, 그게 안 되면 노사정이 참여하는 3자 협의회에 중재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고용주가 지침을 따르지 않거나 중재가 이뤄지지 않으면 노동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회사가 경영상의 필요에 의해 유연근무제를 직원에게 강요하는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유연근무제가 시간과 환경의 문제로 일을 할 수 없었던 이들을 직장으로 이끌어내는 게 목적이지, 기존 직원들의 직업 안정성을 헤쳐 가며 회사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가는 한국의 유연근무제
  
 고용노동부에서 전하는 우리나라의 유연근무제.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회사에는 정부가 지원금도 지급합니다.
ⓒ 고용노동부
 
사실 저출산 고령화는 싱가포르보다 한국이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유연근무제가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면 싱가포르보다 한국에서 더 유용할 겁니다. 싱가포르의 유연근무제에 대해 길게 설명했지만, 사실 한국도 거의 비슷한 형태의 유연근무제가 진작부터 도입이 되어 여러 기업에서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연근무제를 도입하는 회사에 정부에서 보조금까지 줘가며 장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과가 높지는 않습니다. 통계청이 매년 내놓는 <근로형태별 부가조사 결과> 보고서를 보면 2023년 기준으로 임금노동자의 유연근무제 활용 비율은 15.6%로 전년동월대비 0.4%포인트 하락했습니다. 코로나 때 시행됐던 재택 및 원격 근무제가 코로나 종료 이후 크게 줄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연근무제를 활용하지 않는 임금노동자 중에서 향후 유연근무제 활용을 희망하는 노동자는 47.0%입니다. 유연근무제 시행 비율은 줄고 있지만 노동자 둘 중 한 명은 어떤 형태로든 유연근무제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럴 때 싱가포르처럼 노사정이 협의하여 사업자가 합당한 이유를 대지 않으면 노동자의 유연근무제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식의 강력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서 유연근무제가 더 이상 확산되기는 어렵습니다. 확산은커녕 일부 기업에서는 본래 취지와는 전혀 다른 한국적 유연근무제가 시행되는 중입니다.

지난 2월, 삼성전자 반도체 뉴스룸 유튜브 채널에 <'이 시간은 온전히 저를 위해 써요' 새벽 4시 50분 첫 차로 출근하는 삼성전자 반도체 개발자>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월요일에 회사 가는 게 기대가 되어 새벽 첫차를 타고 회사에 간다고 말하는 개발자의 일상을 올린 겁니다. (삼성전자 DS 커뮤니케이션팀은 "해당 유튜브에 출연한 직원은 아기를 키우는 워킹맘으로 육아로 인해 본인 선택으로 새벽 6시에 출근해 오후 3시경 퇴근하면서 유연근무제(자율출퇴근제)를 잘 활용한 사례"라고 알려왔습니다.)

해당 동영상은 해당 채널의 다른 동영상과는 달리 3개월 만에 조회수 120만 회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게 즐거운 직원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그걸 동영상으로 찍어 회사 유튜브 채널에 올려서 홍보하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회사에서 바라는 직원상이 이런 모습이라고 강조하는 게 될 수도 있는 거니까요.
 
 삼성전자 반도체 뉴스룸 채널에 게시 된 <‘이 시간은 온전히 저를 위해 써요’ 새벽 4시 50분 첫 차로 출근하는 삼성전자 반도체 개발자> 영상. 새벽 4시 40분에 첫차를 타고 5시 40분에 회사에 도착하는 개발자의 일에 대한 애정을 담았습니다.
ⓒ 삼성전자 반도체 뉴스룸 화면
 
개발자가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일하는데 임원들이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일 겁니다. 지난 4월, 삼성그룹은 계열사 임원들을 대상으로 주 6일 근무를 실시했습니다. 삼성전자 임원들은 진작부터 주 6일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4월부터 전 계열사 임원들이 동참하는 식으로 확대한 겁니다. 삼성이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우리도 따라 하자고 말하는 기업들도 있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SK그룹은 격주로 토요 사장단 회의를 열고, 침대업체 시몬스 역시 임원들에게 주 6일 근무를 권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임원만 일을 더 하는 건 아닙니다. 지난주에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연구개발직 등 일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주 64시간 특별연장근무를 시행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법정 근로시간은 주 52시간을 초과할 수는 없으나 "연구개발 분야와 같은 특수 직종이나 국가경쟁력 강화 등을 위해 경우에 따라 노동자 동의와 고용노동부의 인가를 거쳐 주 64시간 근무제를 도입할 수 있다"라고 합니다. 삼성전자에서 연구개발직 직원을 대상으로 이 제도를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출산 고령화를 막고 노동자들의 일과 휴식의 균형을 찾아 삶의 질을 개선하자는 취지로 싱가포르가 범국가적으로 유연근무제를 강하게 추진하는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라는 삼성에서는 임원을 대상으로 주 6일 근무를, 노동자를 대상으론 주 64시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의 노동시간은 노동자를 위해 유연해지는데, 한국에서는 사용자를 위해서 유연해지고 있는 겁니다.

주 64시간 근무를 강요받으면서 출산과 육아가 가능할까요? 삼성전자 같은 회사가 많아진다면 한국에서 저출산 고령화를 막는 건 요원한 일이 될 겁니다. 삼성이 이런 식으로 출산을 방해하고 있는 한 정부가 아무리 많은 예산을 출산율 대책에 쓰더라도 효과를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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