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민경배 (12) 교파 초월한 한국교회 목사님들의 성례에 크게 감동

손동준 2024. 6. 18.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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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한창 반정부 시위가 과격하던 때라 학교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종교개혁 당시 성찬 예식의 신학적인 해석의 차이 때문에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들 사이가 불화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각 교파 목사님들이 대거 참여한 성찬 예식을 집례했다는 것은 실로 세기적인 사건이요 쾌거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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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인 해석 차이로 다른 교파와
성례 함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국내 70여 교파 목사님들 대거 참여
백낙준 박사와 한국교회사학회 창설
1995년 ‘한국교회의 위기와 새로운 목회 전망’을 주제로 열린 제15회 연세 목회자 신학 세미나에서 참가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민경배 박사 제공

당시는 한창 반정부 시위가 과격하던 때라 학교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소나무당의 송영길이 그때 총학생회 회장이었다. 당시 데모를 주도하던 학생들이 그 이후의 정치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송영길과 우상호 이성헌 등이 그 주요 인사들이다.

내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원장으로 있을 때 한국교회사에 보감으로 남을 만한 일이 하나 있었다. ‘하기 목회자 신학 세미나’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는 경영학 고위 과정이라든가 산업 고위과정 같은 것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여름방학 동안 두 주일에 걸쳐 신학은 물론, 오전 오후 집중적으로 한국의 거대 인물들을 초청해 강연을 듣고 또 미국에서 저명한 석학을 초빙해 기조 강연을 하게 하는, 대단히 인기 있는 과정이었다. 여기에는 한때 국내 70여 교파 목회자들이 수강했는데 특히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 목사님들이 많이 수강했다. 한때는 980여명이 신청한 때도 있었다.

더구나 이 강좌의 공헌은 이런 여러 교파의 목사님들이 함께 지내며 친숙해져서 한국교회의 화합된 분위기가 조성돼 주님의 온 교회가 일치, 협력하는 듯했던 데에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아주 의미심장한 감격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1984년 여름 대강당에서 성찬 예식이 진행됐는데 한 성찬 예식에 이들이 다 함께 참여했다. 이는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전무후무한 빛나는 사건이다. 경이와 감격의 사건이었다. 대강당을 가득 메운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교파를 초월해 수십 명의 배찬위원들이 베푸는 성례에 감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한국교회 정상의 파노라마였다. 한국교회사에서 특기할 사건이었다. 한국교회의 영원한 이상 실현이었다. 종교개혁 당시 성찬 예식의 신학적인 해석의 차이 때문에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자들 사이가 불화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에서 이렇게 각 교파 목사님들이 대거 참여한 성찬 예식을 집례했다는 것은 실로 세기적인 사건이요 쾌거였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서도 이런 일은 전무후무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세계사적인 자랑이었다.

나는 1966년 봄 당시 연세대 명예총장이던 백낙준 박사를 그의 자택인 장충동에서 만나 한국교회사학회 조직을 함께 의논했다. 그리고 곧 그의 자택에서 한국 최초의 학회를 창설했다. 그때 인사로는 백낙준 김양선 강신명 계일승 마삼락 한태동 이영헌 이장식 박상증 민경배 이영린 주재용 박대인 등이었다. 당시로써는 현란한 인물들의 학회였다. 회장은 백 박사가 맡고 나는 총무로 일하기로 했다. 학회 모임은 월례로 모이기로 하고 그 첫 모임은 상도동의 김양선 목사 댁에서 모였다. 그때 우리는 거기 보관돼 있었던 불국사에서 발견됐다는 ‘경교십자가’, 그리고 네로 황제가 울면서 눈물을 받았다는 눈물단지를 봤다.

김양선 목사는 평양에 수많은 기독교 사적물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해방 이후 그의 부인이 보따리로 몇 차례 38선을 넘어 남한에 옮겨놓고 있었다. 그들의 희생적 봉사를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 그 대부분이 지금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 국보처럼 보존되고 있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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