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막장 드라마 강제 시청의 늪

서승욱 2024. 6. 18.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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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최근 정연욱 국민의힘 의원의 페이스북에 이회창(89) 전 한나라당 총재가 등장했다. 정 의원이 과거 정치부 기자 시절 인연을 맺은 이 전 총재를 예방했다. 첫 등원 길 초선 의원으로 보수의 위기를 바라보는 원로의 지혜를 구하고 싶었으리라. 2017년 유승민 전 의원 대선 출정식 이후 7년 만의 공식 석상 등장이란 보도도 있었지만, 사실 이 전 총재는 지난 대선 직전인 2022년 2월 필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 내용은 '이번 대선은 난장판…허위 네거티브는 침 뱉어야 할 짓'이란 제목으로 본지에 상세히 보도됐다. 본인의 논리에 한 치의 모순이나 어색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인터뷰 내내 형형했던 눈빛과 꼿꼿한 태도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29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는 과거 '보수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카드'로 통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한 세 번의 좌절이었다. "대통령이 돼야만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인터뷰 발언은 필설로 표현 못 할 노정객의 회한을 실감 나게 전달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했던 '대선 당선인을 위한 당부의 말' 역시 필자의 기억에 그림처럼 박혀 있다. "후보 때는 자기가 완벽하다든가, 선택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주 겸손해. 자신을 잘 알지. 그런데 딱 당선만 되면 하늘이 점지한 대통령이 된단 말이야. 제발 사람이 바뀌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하늘의 점지를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갖게 되면 오만과 독선이 생긴다. 그 독점과 횡포를 국민은 혐오하고 정권은 신뢰를 잃게 된다. 그러면 정권이 어떻게 힘을 쓸 수 있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지난 2022년 2월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했다. 우상조 기자

현 정권은 과연 그 지독한 오만과 독선의 사슬을 극복했을까. 현 정권의 현실은 그의 지적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국민의 눈높이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겠다.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선거 전 대통령 부인의 다짐을 국민이 함께 들었다. 선거 뒤 이 약속이 지켜졌는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다. 선거 전과 선거 후를 꿰뚫어 본 듯한 이 전 총재의 경고가 일종의 예언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는다.

「 지난 대선은 역대급 비호감 대결
총선 거쳐 '감옥이냐 탄핵이냐'로
묻지마 캐스팅,진영 대결의 귀결

돌아보면 지난 대선은 비호감 후보가 맞붙은 역대급 대결이었다. 궤멸 직전의 보수 진영이 허겁지겁 영입한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 출신 후보, 각종 의혹과 사법리스크로 점철된 여당 후보 간 경쟁이었다. 국민들은 누가 덜 나쁜가, 차악을 가려내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이 전 총재도 2년 전 인터뷰 환담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민다)과 허장성세(虛張聲勢·실속은 없으면서 큰소리를 치고 허세를 부린다)의 대결이라 하는 사람도 있더라"며 시중의 여론을 농반진반으로 전했다. 진퇴양난의 선택에 내몰린 국민의 당혹감을 축약한 표현이었다.

0.73%포인트 차로 갈린 승부, 절묘하다면 절묘한 민심의 성적표 앞에서 여야 모두 겸손은커녕 오만과 폭주의 페달만 더 밟았다. 비호감 맞대결이던 시즌1은 총선을 거치며 시나리오가 더 난폭해졌다. 시즌2의 주된 테마는 이제 국민 모두가 아는 것처럼 '감옥이 먼저냐, 탄핵이 먼저냐'다. 국민들은 폭력과 활극, 엽기적 반전이 난무할 새 시리즈를 꼼짝없이 시청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현직 대통령 덕에 승승장구했다가 이제 관계가 서먹해졌다는 특수부 검사 출신 새내기까지 비중 있는 배역을 요구하며 등판 기회를 노린다니, 검사와 형사피고인이 얽힌 막장극의 탈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우리 국민은 왜 이런 저질 드라마 강제 시청의 늪에 빠지고 말았을까. 상대 진영을 짓밟을 수만 있다면 삶의 궤적이나 근본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줄을 서는 묻지 마 캐스팅, 합리성이나 유연함 또는 균형감각보다 전투력과 편 가르기에만 열광하는 진영적 관성이 부른 참사가 아닌가 싶다. 이런 막장극이 횡행하는 환경을 초래한 언론인으로서의 책임이 작지 않은 것 같아 필자의 마음이 아주 무겁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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