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막장 드라마 강제 시청의 늪
최근 정연욱 국민의힘 의원의 페이스북에 이회창(89) 전 한나라당 총재가 등장했다. 정 의원이 과거 정치부 기자 시절 인연을 맺은 이 전 총재를 예방했다. 첫 등원 길 초선 의원으로 보수의 위기를 바라보는 원로의 지혜를 구하고 싶었으리라. 2017년 유승민 전 의원 대선 출정식 이후 7년 만의 공식 석상 등장이란 보도도 있었지만, 사실 이 전 총재는 지난 대선 직전인 2022년 2월 필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 내용은 '이번 대선은 난장판…허위 네거티브는 침 뱉어야 할 짓'이란 제목으로 본지에 상세히 보도됐다. 본인의 논리에 한 치의 모순이나 어색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인터뷰 내내 형형했던 눈빛과 꼿꼿한 태도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는 과거 '보수가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카드'로 통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한 세 번의 좌절이었다. "대통령이 돼야만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인터뷰 발언은 필설로 표현 못 할 노정객의 회한을 실감 나게 전달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했던 '대선 당선인을 위한 당부의 말' 역시 필자의 기억에 그림처럼 박혀 있다. "후보 때는 자기가 완벽하다든가, 선택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주 겸손해. 자신을 잘 알지. 그런데 딱 당선만 되면 하늘이 점지한 대통령이 된단 말이야. 제발 사람이 바뀌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하늘의 점지를 받았다는 선민의식을 갖게 되면 오만과 독선이 생긴다. 그 독점과 횡포를 국민은 혐오하고 정권은 신뢰를 잃게 된다. 그러면 정권이 어떻게 힘을 쓸 수 있나."
현 정권은 과연 그 지독한 오만과 독선의 사슬을 극복했을까. 현 정권의 현실은 그의 지적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국민의 눈높이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겠다.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는 선거 전 대통령 부인의 다짐을 국민이 함께 들었다. 선거 뒤 이 약속이 지켜졌는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다. 선거 전과 선거 후를 꿰뚫어 본 듯한 이 전 총재의 경고가 일종의 예언처럼 느껴져 소름이 돋는다.
■
「 지난 대선은 역대급 비호감 대결
총선 거쳐 '감옥이냐 탄핵이냐'로
묻지마 캐스팅,진영 대결의 귀결
」
돌아보면 지난 대선은 비호감 후보가 맞붙은 역대급 대결이었다. 궤멸 직전의 보수 진영이 허겁지겁 영입한 문재인 정부 검찰총장 출신 후보, 각종 의혹과 사법리스크로 점철된 여당 후보 간 경쟁이었다. 국민들은 누가 덜 나쁜가, 차악을 가려내는 데 집중해야 했다. 이 전 총재도 2년 전 인터뷰 환담에서 "교언영색(巧言令色·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꾸민다)과 허장성세(虛張聲勢·실속은 없으면서 큰소리를 치고 허세를 부린다)의 대결이라 하는 사람도 있더라"며 시중의 여론을 농반진반으로 전했다. 진퇴양난의 선택에 내몰린 국민의 당혹감을 축약한 표현이었다.
0.73%포인트 차로 갈린 승부, 절묘하다면 절묘한 민심의 성적표 앞에서 여야 모두 겸손은커녕 오만과 폭주의 페달만 더 밟았다. 비호감 맞대결이던 시즌1은 총선을 거치며 시나리오가 더 난폭해졌다. 시즌2의 주된 테마는 이제 국민 모두가 아는 것처럼 '감옥이 먼저냐, 탄핵이 먼저냐'다. 국민들은 폭력과 활극, 엽기적 반전이 난무할 새 시리즈를 꼼짝없이 시청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현직 대통령 덕에 승승장구했다가 이제 관계가 서먹해졌다는 특수부 검사 출신 새내기까지 비중 있는 배역을 요구하며 등판 기회를 노린다니, 검사와 형사피고인이 얽힌 막장극의 탈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우리 국민은 왜 이런 저질 드라마 강제 시청의 늪에 빠지고 말았을까. 상대 진영을 짓밟을 수만 있다면 삶의 궤적이나 근본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줄을 서는 묻지 마 캐스팅, 합리성이나 유연함 또는 균형감각보다 전투력과 편 가르기에만 열광하는 진영적 관성이 부른 참사가 아닌가 싶다. 이런 막장극이 횡행하는 환경을 초래한 언론인으로서의 책임이 작지 않은 것 같아 필자의 마음이 아주 무겁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9억으론 아들 집 못 사줘” 반포맘이 노리는 7월의 대박 [강남엄마 투자법②] | 중앙일보
- 황보라 "흉기로 쑤시는 느낌"…의료파업에 큰일 날 뻔, 무슨일 | 중앙일보
- 2만원이면 논문 껌이다…PPT도 1분만에 만드는 'AI 조교' | 중앙일보
- 박세리 집 강제 경매 넘어갔다…직접 설계한 '나혼산' 그 건물 | 중앙일보
- 15층 계단 오르다 기절할 뻔…그 아파트는 '노인 감옥' 됐다, 왜 | 중앙일보
- 남성진, 故남일우 떠올리며 눈물…"몸무게 38㎏까지 빠지셨다" | 중앙일보
- 법사위원장까지 판사 공격 가세…'이재명 로펌' 된 법사위 | 중앙일보
- 이승기, 94억 주고 187평 땅 샀다…'서울 부촌' 소문난 이 동네 | 중앙일보
- 中서 퇴근하다가 참변…냉동트럭 화물칸 탄 여성 8명 질식사 | 중앙일보
- 대통령 아들까지 가담했다…축구 팬들 난투극에 독일 비상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