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도 장롱도 텅 비었다…범죄 타깃 되는 노부부 [강주안 논설위원이 간다]
〈초고령사회 길목서 비상 걸린 노인 대상 범죄〉
서울 용산에 사는 A씨(60)는 지난해 10월 치매 등을 앓는 부모님 옷장을 정리하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불과 얼마 전 옷장을 정리할 때 봤던 모피 코트와 명품 백 등이 사라진 것이다. 온 집안을 뒤졌으나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옷뿐이 아니었다. 귀금속과 장신구도 상당수 자취를 감췄다.
부모님은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가사도우미와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왔다. 이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두 사람의 소행이라면 계속 부모 곁에 둘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은 암 수술을 한 모친의 낙상에 대비해 설치한 폐쇄회로(CC)TV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집에서 넘어져 뼈가 부러졌으나 아무 얘기를 않는 바람에 며칠이 지나서야 골절상임을 확인한 일이 벌어졌다. 가족들은 어머니의 동선을 따라 CCTV를 설치해 나중에라도 사고 여부를 파악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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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 부부 돌보던 도우미·간병인·운전기사 절도 혐의 수사
각각 물품 훔치고 통장서 억대 현금 인출…“믿고 지냈는데”
낙상 방지용 CCTV에 범행 장면 담겨 발각, 경찰 수사 중
“아들 장기 떼내 판다” 협박에 1850만원 건넨 전직 교사도
」
기억 흐려지자 오랜 신뢰 배신
이 CCTV에 옷과 귀금속이 사라진 단서가 잡혔는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녹화된 동영상을 재생해보다가 자식들은 깜짝 놀랐다. 거기엔 도우미와 간병인의 의아한 행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옷장에서 모친의 옷을 꺼내 자신에게 대보는가 하면 옷을 걸어두고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는 장면이 기록됐다. 마루 장식장에서 뭔가를 꺼내는 장면도 잡혔다. 어머니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 뒤 간병인이 마루 장식장을 열고 뭔가를 집는 듯하더니 부엌 뒤쪽으로 사라졌다. 모친이 화장실에서 나오기 직전 간병인은 부엌에 다시 나타나 일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식들은 상의 끝에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가 시작되자 일단 범행을 부인했으나 압수수색 과정에서 일부 증거가 나왔다. 부모 집에 있던 주방 도구 등이 이들의 집에서 발견된 것이다. 가족들이 분실 품목을 파악한 결과 모피 코트와 명품 가방, 다이아몬드 반지 등 최소 1억 594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A씨는 “믿고 맡긴 사람들에게 부모님이 이런 일을 당하니 너무 화가 난다”고 말했다.
간병인은 일부 범행을 시인했지만, 도우미는 “할머니가 버리라고 한 것”이라며 부인했다. 도우미의 집에선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특이한 주류가 발견됐다. 부모님이 얼마 전 선물 받은 외국 술과 똑같은 제품이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치매 등을 앓는 부모님에게서 범행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듣기는 어려웠다.
증거 나오자 “나한테 준 것”
경찰 관계자는 “이 사건의 경우 품목이 많고 액수가 크지만, 노인끼리 사는 집에서 물건 몇 개를 훔치는 범죄가 자주 발생한다”고 말한다.
미국선 노인 범죄 예방책 마련
외국에서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노인을 대상으로 한 사기 범죄가 전년보다 14% 증가했다. 피해액은 모두 34억 달러(약 4조7000억원)에 달한다. 60세 이상 사기 피해자 수가 10만 명을 넘었고, 그중 기술 지원 사기(Tech support scams)가 1만7696건으로 가장 많았다.
기술 지원 사기는 보이스피싱과 흡사하다. FBI가 지난해 7월 공개한 수법을 보면 사기범은 합법 업체를 가장해 전화와 문자·이메일로 노인에게 연락한 뒤 환불을 해주겠다며 원격 제어 프로그램 설치를 유도한다. 이후 은행 계좌로 너무 많은 돈을 보내서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현금을 택배로 특정 편의점에 보내도록 하는 수법이다.
경찰관에도 피해 숨긴 노인
지시대로 인근 초등학교로 가자 한 여성이 나타났고 범인은 “아무 말 말고 돈만 건네라”고 했다. 이후 “아들을 학교로 보낼 텐데 그사이 누구에게라도 말을 하면 아들은 죽는다”고 했다. 출동한 경찰에게까지 숨긴 건 그 때문이었다. 아들이 나타나서야 사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교사 출신으로 매사가 철저한 모친이지만 노인의 심리를 노린 사기범 앞에서 무너졌다. 지금도 가족의 인적사항과 전화번호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미스터리다.
박외병 동서대 경찰학과 교수는 “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피해자뿐 아니라 범죄자도 늘고 있다”며 “초고령사회로 가는 만큼 노인 범죄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와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경찰청 홈페이지에는 노인 학대 및 실종 예방 정책이 청소년보호과 담당 업무로 소개돼있다.
“경찰에 노인 전담 부서 둬야”
노인 범죄 피해가 증가하는데도 이에 대한 실증 연구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심혜인 ‘노인의 범죄피해 예측요인 연구’). 논문에 따르면 미국은 미 연방예금보험공사와 소비자금융보호국이 개발한 ‘머니 스마트 프로그램’을 전역에서 시행하고 있다. 집배원을 대상으로 독거노인의 상태를 체크하는 훈련도 한다.
경찰 관계자는 “노인이 거주하는 집에 CCTV를 달고 가족이 평소에 필요한 사항들을 수시로 체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일단 생각할 수 있는 예방책”이라고 말했다.
노인의 정신이 쇠약해지면 가까운 사람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A씨 형제들은 부모의 도난 사실을 안 직후 수십 년간 부친을 도와 온 운전기사에게 연락해 아파트 CCTV 영상 확인을 요청했다. 그런데 반응이 석연치 않았다. 이후 부친의 통장에서 거액의 현금이 반복적으로 인출된 사실을 알아냈다. 경찰 수사 결과 운전기사의 소행이었다. 가족의 충격은 더 컸다. 노부부가 치매 등으로 인지 능력이 떨어지자 이들을 돌봐 온 세 명이 모두 금품에 손을 댄 셈이다.
지난 11일 오후 2시 30분쯤 사건이 발생한 용산의 아파트를 찾아가 봤다. 현관에 들어서니 신체를 지탱하기 위한 장치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침대와 화장실에도 노인용 보조 장치가 붙어있다. 범행을 밝혀낸 CCTV가 마루 천장에 달려있다. 낙상 파악을 위해 달았기 때문에 노인의 동선을 향해 있어 귀중품을 보관한 옷장이나 부엌에서 도우미 방 창문으로 이어지는 통로 등은 사각지대다. 기력이 쇠퇴하는 노인들을 노리는 범죄자에겐 사방에 빈틈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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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 확대 등으로 범죄 기회 줄여야”
이창무 한국안전사회연구원 이사장(중앙대 교수·사진)은 17일 “노인 대상 범죄에 체계적인 대응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노인의 범죄 피해가 늘고 있다.
“노령연금·주택연금 등으로 노인의 경제 능력이 향상되고 평균 연령이 늘어나면서 범죄자 입장에서 만만한 대상이 됐다. 계속 늘 수밖에 없다.”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범죄 기회를 줄이기 위해 노인의 범죄 취약성을 보완하는 게 우선이다. 노인들의 위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홍보와 교육이 시급하고 AI 기반 지능형 CCTV 등이 필요하다.”
-그런 게 효과가 있을까.
“범죄는 기회가 있어야 발생한다. 요즘 카페에 새 전화기를 두고 가도 CCTV가 있으니 남이 안 가져간다. 강력 사건이 줄어든 것은 사람들이 선해져서라기보다는 CCTV의 영향이 크다.”
-사기 피해가 심각하다.
“노인 본인의 동의하에 모든 금융거래를 가족이 중복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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