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의 그 남자... 어떻게 '515억 기부' 회장이 되었나

김종성 2024. 6. 17. 17: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 기획조정과장을 지낸 고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의 흥미로운 이력들

[김종성 기자]

 정문술 KAIST 전 이사장이 2014년 1월 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리츠칼튼 호텔에서 기부금 약정식을 마친 뒤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515억 카이스트 기부'로 잘 알려진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겸 카이스트 이사장이 지난 1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정 전 회장에게는 흥미로운 이력이 있는데, 김재규 부장 시절에 중앙정보부 기획조정과장을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가 1983년에 반도체 기업인 미래산업을 세우고 대성공을 거둔 데는 정보기관 상호 간의 알력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업무 특성상 라이벌 관계를 피하기 힘들었던 중앙정보부(중정)와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는 박정희 유신체제 말기에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 유신 붕괴 2년 전에 벌어진 사건은 상대방의 약점을 그냥 좌시하지 않는 두 정보기관의 치열함을 잘 보여준다.

김재규, 김기춘, 그리고 전두환 

1977년 10월 20일, 전방부대 대대장인 유아무개 중령이 오아무개 일병을 데리고 철책선을 넘어 월북했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사 기자의 < KCIA 남산의 부장들 >에 인용된 전 보안사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유 중령이 월북한 것은 보안부대장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평소 사단 보안부대장 황모와 매우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황은 유 중령에 관한 이런저런 약점을 캤고, 어느 날 '유 중령, 너는 며칠 뒤 나한테 직접 조사받아봐'라고 겁을 주었다. 그러자 유는 화도 나고 겁도 나서 이판사판으로 월북해 버렸다고 한다."

보안사는 유 중령의 월북을 납북으로 보고했다. 박정희도 그렇게 보고를 받고, 10월 26일에 유엔군사령부(유엔사)도 그렇게 발표를 했다. 유엔사는 "유 중령, 오 일병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자유의사를 밝힐 기회를 주라"며 북한을 압박했다.

이때, 유엔사의 발표에 의심을 품고 진상을 파헤친 곳이 김재규 부장의 중정이다. 그 결과, 자진 월북이었다는 사실이 청와대에 보고되고 "박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냈다"고 위 책은 알려준다. 뒤이어 보안사의 월권과 폐해를 바로잡으라는 대통령 특명이 떨어졌다. 이 명령에 따라 보안사 축소 작업을 진행한 인물이 검사 출신인 김기춘 중정 대공수사국장이다.

훗날 박근혜 정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게 될 김기춘 당시 국장은 보안사 권력의 핵심인 정보처를 제거했다. 일반 국민과 국가기관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는 핵심 부서를 없앤 것이다. 1988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 4면 좌상단은 신임 검찰총장 김기춘을 "매서운 눈매에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전형적인 검사"라며 "중앙정보부 파견 근무 당시 보안사의 민간 업무 관여에 철퇴를 내린" 인물로 소개했다.

1977년 연말부터 '김기춘의 철퇴'로 보안사가 약해지는 상황은 한 해 앞선 1976년 12월 4일 개각 때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에게 유리했다. 이는 김재규와 대립관계인 차지철 경호실장에게는 불리한 국면이었다.

이 상황에서 차지철과 가까운 전두환이 등장했다. 제1사단장이던 전두환이 1979년 3월 5일 보안사령관에 취임했다. 뒤이어 전두환이 보안사의 복권을 박정희에게 건의하는 일이 일어났다. < KCIA 남산의 부장들 >은 전두환이 "각하, 아무래도 보안사도 민간정보 수집을 해야 하겠습니다"라고 건의한 뒤 곧바로 재가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김재규 쪽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해 7월, 그는 역공에 나섰다. 이 역공을 위한 실무 작업에 참여한 이가 41세의 정문술 과장이다. 1998년에 나온 회고록인 <왜 벌써 절망합니까>에서 정문술은 이렇게 말했다.

"10·26이 일어나기 3개월 전, 중앙정보부는 보안사령부 축소 작업을 단행했다. 군 정보부대인 보안사령부가 원래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반인 대상의 정보 활동을 벌이다 보니 적폐가 심하다는 이유로 축소 지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나는 직무상 그 작업에 관계하게 되었다."

"내가 안 가고 누가 가랴" 정문술의 선택 

원광대 동양철학과에 들어간 다음에 군에 입대한 청년 정문술은 신병 훈련이 끝난 뒤 육군행정학교로 자대 배치를 받고 뒤이어 육군본부로 옮겨갔다. 육본 부관감실 통계과에서 육군 업무 전산화 작업에 참여한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접했다. 컴퓨터 자체가 생소했던 1960년 무렵에 상당한 행운을 누린 셈이다.

얼마 안 있어 박정희 쿠데타가 일어났고, 군사정부인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그는 옮겨갔다. 군사정권이 불안정하던 따라 언제 또다시 뒤집힐지 모른다는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육본 행정요원들은 최고회의 발령을 꺼렸다고 한다. "쿠데타가 진압된다면 졸지에 반역자로 몰려 죽게 된다"는 두려움이 행정요원들 사이에 있었다고 정문술은 말한다.

그렇지만 정문술은 다른 병사들과 달랐다. 최고회의가 행정요원을 모집한다는 소문에 그는 흥분했다. 회고록에서 그는 "새로운 집단에는 항상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이 있었다"라며 "그 소문을 듣자마자 나는 다시 한번 흥분했다. 내가 안 가고 누가 가랴"라고 결심했다고 말한다.

최고회의에서 실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은 그는 군을 제대하자마자 중앙정보부 5급(지금의 9급) 직원으로 특채됐다. 그는 명문대 출신들은 4급으로 특채됐지만 자신은 "강한 승부욕"으로 근무한 끝에 "동기들 중에서는 물론 중앙정보부 내에서도 가장 빠른 승진 기록을 세웠다"고 회고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가 1979년 7월에 보안사 축소 임무를 담당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3개월 뒤 김재규의 거사가 실패하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실권을 쥐게 되면서 정문술의 처지는 일변했다. 그는 "10·26과 함께 보안사령부가 득세하면서 이번에는 중앙정보부가 풍전등화 신세였다"는 말로 박정희 피살 직후를 회고했다.

보안사는 마치 점령군이 된 것처럼 중정을 다뤘고, 5·18 한 달 전인 1980년 4월 14일에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서리까지 겸직했다. 그 다음달, 그의 '회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1980년 5월이었다. 평소처럼 출근했더니 그날따라 회사 분위기가 이상했다. 나를 포함하여 간부급만 수십 명이나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다. 보복치고는 너무나 잔인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갑자기 접한 해고 통보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정신이 멍해진 나는 책상 정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회사를 나왔다."

하루아침에 해고... 그의 다음 행보 

정문술은 "제대와 동시에 중앙정보부로 특채되어서 고스란히 18년을 그곳에서 일했다"고 회고했다. 박정희가 최고권력을 행사한 기간만큼 정문술은 중정에서 인생을 보냈던 것이다. '그곳'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된 그날, 정신이 멍해진 40대 초반의 이 가장은 중정을 나와 길거리를 헤매다가 한동안 뜸했던 친구를 불러 점심을 먹었다.

친구는 "정문술이가 점심을 먹자고 할 때가 다 있다"며 희한해 했고, 그런 동안에도 자신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고 정문술은 기억했다. 그날 그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그동안 직장밖에 몰랐던 생활이었다"라며 "대낮에 갑자기 갈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고 한 뒤 "별 수 없이 집으로 갔다"고 말한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던 그는 그 뒤 반도체 분야로 뛰어들어 대성공을 이룬다.

보안사 권한을 축소하는 작업을 맡은 게 화근이 돼 정보부에서 쫓겨난 일은 정문술의 삶에 새로운 전기가 됐다. 이는 그가 큰 기업을 일구는 계기로 작용했다. 유신 말기의 정보기관 권력 암투가 그를 성공한 기업인의 삶으로 내쫓는 원인이 된 셈이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