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섐보 “페인이 여기 있다”…1999년 US오픈 챔프 페인 스튜어트 소환
17일(한국시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빌리지 오브 파인허스트의 파인허스트 리조트&컨트리클럽 2번코스(파70)에서 열린 제124회 US오픈(총상금 2150만달러) 최종일 18번 홀(파4).
브라이슨 디섐보(미국)의 1m 남짓 파퍼트가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승을 확정지은 디섐보는 양팔을 들어 올리며 갤러리 환호를 유도했다. 캐디와 뜨거운 포옹을 마친 디섐보는 갑자기 모자를 벗어 들고 뒤쪽에 부착한 배지를 방송 카메라 쪽을 향해 들이 밀며 “페인이 여기 있다”라고 외쳤다.
페인 스튜어트는 1999년 US오픈 챔피언이다. 당시 대회도 올해와 같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 골프 앤드 리조트에서 열렸다. 25년 전 대회에서 스튜어트는 자신보다 13살 적은 29살의 필 미켈슨(미국)과 우승 경쟁을 펼쳤다.
17번 홀까지는 스튜어트가 1타 차 선두였다. 그리고 마지막 18번 홀, 미켈슨의 버디 퍼트는 아슬아슬하게 홀컵을 외면했다. 스튜어트가 5.5m 가량의 파 퍼트를 성공해야만 우승컵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코 쉽지 않은 거리였다. 연장전이 예상됐다. 그러나 스튜어트의 퍼터 페이스를 떠난 볼은 거짓말처럼 홀 속으로 사라졌다.
우승을 확정한 스튜어트는 오른 주먹을 움켜쥐고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는 세리모니를 했다. 골프팬들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자리 잡은 역사적인 우승 세리머니 중 하나다. 디섐보가 모자에 달고 다닌 배지는 그런 25년 전 스튜어트의 우승 세리모니를 그림으로 재현한 것이었다.
스튜어트는 US오픈 우승을 거둔 뒤 4달여가 지난 1999년 10월 25일 비행기 추락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프로에 데뷔한지 정확히 20주년, 통산 18승(메이저 3승 포함)을 거둔 위대한 골퍼는 작별 인사도 없이 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올 US오픈에서 디섐보가 우승하면서 위대한 골프 영웅 스튜어트가 소환됐다. 스튜어트는 현역 시절 대부분 선수들의 패션과 달리 헌팅캡을 쓰고 긴 양말을 신는 '니코보코' 스타일로 필드를 누볐다. 그는 생전에 수많은 봉사 활동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는 사회 공헌을 많이 한 선수에게 ‘페인 스튜어트’ 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디섐보는 대표적인 스튜어트 키즈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튜어트의 그림을 보고 스튜어트와 같은 미주리주립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2년에 LIV골프로 이적하기 전까지 PGA투어서 거둔 8승을 모두 스튜어트가 즐겨 썼던 헌팅캡을 쓰고 거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스튜어트 만큼 극적이진 않았지만 디섐보의 마지막날 18번 홀 파세이브도 US오픈 역사상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게다가 4년전 우승 때는 코로나 19 펜데믹으로 무관중 상태였지만 이날은 ‘USA’를 연호하는 홈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 속에서 거둔 것이어서 디섐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다시 25년 전으로 되돌아 가본다. 챔피언 퍼트를 성공시킨 스튜어트가 미켈슨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을 건넨다. “필, 아이를 얻었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야. 너는 좋은 아빠가 될 자격이 충분해”라고. 그리고 그 다음날 미켈슨은 첫 딸 어맨다를 얻었다.
스튜어트의 인간 됨됨이는 그의 장례식에서 절친인 폴 에이징어(미국)의 추도사로 충분히 가늠이 된다. 에이징어는 “페인 스튜어트는 인생을 사랑한 골퍼였다. 그는 이기고도 우아했고, 지고도 우아했다”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많은 선후배 동료 선수들과 골프팬들은 스튜어트가 그런 인성의 소유자이었기에 좋아하고 오래 동안 애도했다. 올해로 31세가 된 디섐보도 그런 이유 때문에 스튜어트를 롤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여기서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만약 스튜어트가 생존해 있다면 PGA투어를 떠나 골프의 정통에서 다소 비껴난 LIV골프에 새로운 둥지를 튼 디섐보에게 과연 어떤 말을 했을까. 그 답은 각자의 상상에 맡기고 다시 한번 디섐보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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