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우먼톡]조선의 천재 정약용 대신 가사를 책임진 아내 홍혜완

2024. 6. 1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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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게 들리는 이름이 있다.

다산 정약용,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 중 한 사람이자 다산학의 근간이던 그가 바로 홍혜완의 남편이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이름도 다산의 아내 풍산 홍씨로 기억된다.

틀림없이 남편 정약용과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편지를 주고받았겠지만, 남편의 문집에 간접적으로만 남아 있다.

다행히 남편 정약용은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올랐지만, 좋은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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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아내로 힘든 삶
농사 지으며 온갖 궃은일 도맡아
귀양지 남편과 자식들 뒷바라지
이한 역사작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하게 들리는 이름이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다산 정약용,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 중 한 사람이자 다산학의 근간이던 그가 바로 홍혜완의 남편이었고, 그렇기에 그녀의 이름도 다산의 아내 풍산 홍씨로 기억된다. 홍혜완은 스스로 쓴 기록을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틀림없이 남편 정약용과 많은 대화를 주고받고 편지를 주고받았겠지만, 남편의 문집에 간접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녀는 무관 홍화보의 딸로, 15살 때 어여쁜 다홍치마를 입고 정약용과 결혼했다. 조선에서 제일가는 천재의 아내가 되었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정약용은 성균관의 시험에서는 계속 장원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대과 시험에서는 낙방을 거듭했다. 가난한 살림에 마침내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어느 날, 종이 옆집의 호박을 훔쳐 왔다. 하지만 홍혜완은 회초리까지 들고 종을 야단쳤다. 아무리 배가 고프다 해도 남의 것을 훔칠 수는 없었다.

이 광경을 보던 정약용은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시를 지었다. 그 시 덕분에 이런 사연을 알 수 있지만, 시나 짓고 있는 남편을 대신해 어떻게든 먹을 것을 마련하고 자식들을 돌보는 일은 홍혜완의 몫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남편 정약용은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올랐지만, 좋은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정조가 승하하고 신유박해가 벌어지자,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귀양을 가게 된다. 홍혜완은 어린 막내아들을 안은 채 머나먼 귀양길을 떠나가는 남편을 배웅했다.

이후로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홍혜완은 온갖 궂은일을 하며 가족들을 보살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마늘을 심고 밤을 주웠으며, 누에를 키웠다. 하지만 슬픔은 계속되었다. 평생 그녀는 9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두 아들과 한 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일찍 죽었다. 특히 막내아들은 귀양 간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며 아파하다가 죽었다. 이 모든 고통을 겪은 홍혜완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정약용은 집의 가난과 아이들의 질병, 그리고 죽음 앞에서 몹시 슬퍼했지만 귀양지에서 묶인 몸으로는 편지를 보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홍혜완은 꾸준히 농사를 지었고, 자식들을 귀양지의 남편에게 보낼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뒤에 있었을 수많은 눈물과 땀과 괴로움은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어떻게 그 모든 걸 해냈을까.

그런데 홍혜완은 마냥 운명에 순종하는 여인은 아니었고, 오히려 남편을 야단치는 강한 아내였다. 둘째 형 정약전의 외아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잠긴 형수는 먼 친척을 양자로 들이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약용이 ‘예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반대하자 홍혜완은 엄한 편지를 보냈다. "사람이 더 중요하니까 예를 말하지 말라"고. 결국 천하의 정약용도 뜻을 굽혔다.

귀양지에서 지낸 지 18년 만인 1818년 마침내 남편 정약용은 귀양지에서 풀려나 홍혜완의 곁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홍혜완의 나이는 57세, 노인이 되어 남편을 만나고 또 18년을 함께 살았다. 그리고 결혼 60년을 축하하는 회혼의 날, 정약용은 세상을 떠난다. 홍혜완은 그로부터 2년 뒤 남편 곁에 묻혔다.

좌절과 슬픔이 가득한 삶이었지만 정약용이 죽는 날까지 머문 곳은 마현의 집이었다. 남편보다도 더 깊은 슬픔을 견디면서 집을 일구어낸 홍혜완이 없었다면, 과연 인간 정약용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한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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