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민경배 (11) 한국 최초 개신교 순교자로 추앙받아야 할 ‘로버트 토마스’

손동준 2024. 6. 1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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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1969년 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중 나탈 교수와의 대화에서 우연히 한국에서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여기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중국에 파송한 런던선교회의 말을 듣지 않고 한국에 스스로 나왔다가 순교했다.

한국교회 첫 순교자의 모습을 기념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그 소중한 로버트 토마스의 친필 편지들을 꼭 읽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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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선교회 사서 플래처의 논문에서
우리가 존경하는 한국 첫 순교자에게
‘말 듣지 않는’이라는 표현 듣기 거북
목사가 쓴 편지 전부 복사해 와 간행
민경배(오른쪽 첫 번째) 박사가 1970년 3월 영국 웨일스의 하노버교회를 방문해 연세대 교수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민 박사 제공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1969년 봄,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중 나탈 교수와의 대화에서 우연히 한국에서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영국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탈 교수는 나에게 토마스가 웨일스 출신이며 그의 아버지가 목회했던 웨일스의 하노버교회 인물들을 소개해줬다.

이 교회는 토마스가 다녔던 곳으로 방학을 이용해 영국에서 연구 중이던 연세대 차일환 양승두 이경회 교수들과 함께 그 교회를 방문했다. 감개가 무량했다. 하노버교회는 2014년 1월부터 한국인 목사 유재연이 목회하고 있다.

런던으로 돌아온 후 나는 로버트 토마스 목사를 중국에 파송했던 런던선교회 도서관을 찾아가 사서인 플래처 여사를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저술한 ‘Robert Jermain Thomas - The Naughty Missionary’라는 논문을 선물로 줬다. 고마웠다. 그러고는 토마스 목사가 쓴 편지 전부를 복사하게 해줬다. 나는 이 서간 전부를 번역해 2017년 출판사 동연에서 간행할 수 있었다. 그의 생생한 편지이기 때문에 그 역사적 가치는 지대하다. 실로 한국교회에서 많이 그리고 깊이 읽혀야 할 아주 소중한 자료다.

그런데 플래처 여사 논문의 ‘Naughty’란 글이 읽기에 거북한 의미다. ‘말을 듣지 않는’ ‘못된’ ‘버르장머리 없는’ 등의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 토마스 선교사는 자기를 중국에 파송한 런던선교회의 말을 듣지 않고 한국에 스스로 나왔다가 순교했다. 그래서 런던선교회 도서관 사서는 ‘말을 듣지 않는’이라는 말을 한 것이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표현이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고 사랑하고 높이는 한국의 첫 순교자에게 쓰이고 있었다. 런던선교회의 공식 역사서에도 토마스 목사가 “선교회 말을 듣지 않고 한국에 갔다가 물에 빠져 죽은 것 같다”는 표현까지 여지없이 적혀 있었다.

당황스럽기가 한이 없다. 아무리 자기들 말을 듣지 않고 한국에 갔다고 한들 순교자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역사의 포악성이 아닐 수 없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자 순교자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는 우리가 기념하고 사랑하는 교회사의 영광이자 기념탑이다.

한국교회 첫 순교자의 모습을 기념하고 사랑하는 이들은 그 소중한 로버트 토마스의 친필 편지들을 꼭 읽어주시기 바란다. 한국교회 성도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일성 일가도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특별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대동강에서 1866년 ‘미제’ 로버트 토마스를 죽인 것을 ‘공로’이자 정통성으로 내세우고 있다.

나는 1975년 연세대로 돌아왔다. ‘연세춘추’ 편집인 겸 주간을 맡았다. 당시 학생들의 데모 사태로 그 신문 발행에 시련이 많았다. 학교 안에는 정보부 요원과 경찰 등 여러 곳에서 기관원 정보원들이 여럿 진주하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교목실장과 신과대학장 그리고 1984년 8월부터 88년 8월까지 교무처장직을 맡았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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