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밀양, 20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20년 전 사건 당시에는 격분했고, 이후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한공주’도 가슴 아파하며 봤지만 오랜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다. 당시 피해 여중생은 이제 30대인데,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다고 한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 일부 유튜버들의 ‘사적 제재’ 논란과 함께 다시 뉴스의 중심에 선 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피해자 얘기다.
소도시 밀양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다. 남고생 44명이 1년여 동안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했다. 영상을 찍어 공개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으나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미성년자라는 이유였다. 법원은 철저히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사정을 헤아렸다. 피해자와 떨어져 살던 아버지는 합의금을 챙겼고, 피해자와 어머니에게 한 푼도 주지 않았다. 경찰마저 피해자의 신상을 외부에 흘리고, “여자애가 밀양 물을 흐렸다”며 2차 가해를 일삼았다. 지역사회 여론도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는 쪽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가해자들은 물론 가정, 학교, 지역사회, 수사ㆍ사법기관까지 합심해 한 소녀의 인권을 유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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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해자 신상공개 밀양사건 재조명
유튜버식 정의구현, 사적 제재 논란
처벌 못잖게 피해자 보호 지원 중요
」
우리 사회가 이를 20년 만에 재소환하는 방식은 어떠한가. 발단은 한 유튜버가 밀양 가해자 일부의 신상과 근황을 폭로하면서다. 요즘 온라인에서 유행하는, 사회적 ‘빌런’들의 신상을 털어 단죄하는 ‘사적 제재’의 일환이다. 사회적 파장이 일자 여러 유튜버가 속속 뛰어들었다. 구독자 수와 조회수가 늘고 후원금도 쏟아졌다. 돈 되는 콘텐트가 된 것이다. 당시 수사팀, 판사들의 신상도 공개됐다. 그 과정에서 엉뚱한 인물이 가해자(측)로 지목됐다. 한 유튜버가 신상 공개 여부를 놓고 가해자와 금전적 거래를 시도한다는 의혹도 나왔다. 맨 처음 신상 공개에 나선 유튜버는 “피해자와 소통하고 있다”고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고, 또 다른 유튜버는 피해자 동의 없이 피해자의 통화 음성을 공개하고 이를 내려달라는 피해자의 요청을 한참이나 묵살했다. 이 유튜버에 대해서는 밀양 가해자 중 한 명과 친분이 깊다는 의혹까지 나온 상태다.
피해자를 대신해 정의를 구현한다면서 정작 피해자에 대해서는 그 어떤 고려도 하지 않은 상황.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유튜버들에게는 가해자들의 삶을 무너뜨리겠다는 게 콘텐트화하는 측면이 있다”면서 “그 과정이 피해자에게는 어떨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기획”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최근 수년간 우리 사회에는 ‘사적 제재’ 트렌드가 거세다. 대중문화에는 ‘스스로 악마가 돼서 악마를 처단한다’는 ‘사적 복수극’이 주된 흥행 요소로 자리 잡았다(심지어 디즈니플러스 ‘비질란테’에서는 미래의 공권력인 경찰대생이 사적 제재에 나선다). 범죄자들이 ‘필벌’도, ‘엄벌’도 받지 않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발이 낳은 결과다. 뿌리 깊은 ‘사법불신’이 원죄란 얘기인데, 그러나 ‘반영웅 자경단’ 스토리는 드라마와 영화로 충분하다.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사적 제재는 현대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더구나 신상 공개 과정을 통해 밀양 가해자들이, 명예가 훼손되고 인격 침해가 우려되는 피해자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가 지독한 아이러니다.
죗값을 제대로 물리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게 피해자의 일상 회복과 그를 위한 피해자 보호ㆍ지원이다. 모든 피해자는 피해 이전 삶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피해자의 사회 복귀는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사적 복수처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야말로 사회의 공적 시스템이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다”(홍성수 숙대 교수). 과연 그 수많은 범죄 피해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국가와 사회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함께 던지는 게 피해자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밀양을 제대로 소환하는 방식이 아닐까 한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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