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의 미래를 묻다] 타고난 기질도 바꾼다…급성장하는 호르몬 시장
다수가 모여 조직을 이루면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통신체계가 필요하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몸속 의사소통도 실제 통신체계처럼 유선과 무선, 두 가지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인체의 ‘유선통신체계’는 바로 신경계다. 외부의 자극을 인식한 감각신경이 이를 중추신경계에 전달한다. 뇌에서 해석되고 처리된 정보는 다시 운동신경을 통해 전달돼 근육의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이 순환을 이루는 신경세포가 끊어지면 전체 과정은 제대로 일어나지 못한다.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해 신경에 손상을 입으면 감각이 무뎌지거나 움직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
「 인체, 내분비계 통해 균형 조절
성장·감정·식욕·면역반응 관장
호르몬 치료 연 1.5~5% 성장
왜소증 치료 아동 사망 비극도
」
여기에 인체는 무선통신체계라 할 수 있는 내분비계(endocrine system)를 통해 균형을 조절한다. 무선통신에서 송신기는 전파를 사방으로 발산하지만, 주파수가 맞는 수신기만이 이를 받아서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인체 내 다양한 내분비샘에서 방출한 호르몬들은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지만, 표적기관에 존재하는 특정 호르몬 수용체에만 결합해 기능한다. 호르몬을 분비하는 기관과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표적기관의 상대적 위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특정 호르몬과 결합하여 신호를 받을 수 있는 전용 수용체의 존재와 이들이 제 기능을 하는지 여부다.
호르몬의 발견
19세기를 지나면서, 과학자들은 동물 실험을 통해 갑상샘이나 부신·뇌하수체 등을 제거하면 실험 동물에게서 다양한 이상 증상이 나타나며, 제거된 기관들을 다시 이식하면 증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이들 기관에서 신체의 균형을 조절하는 ‘물질’이 분비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 가능성이 확실해진 것은 1902년이었다. 영국의 생리학자 윌리엄 베일리스와 어니스트 스탈링은 동물에게서 이자액의 분비를 조절하는 물질을 찾아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고, 여기에 ‘분비하다’라는 뜻의 세크레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세크레틴의 발견 이후, 연구자들은 우리 몸 곳곳에 뇌하수체·시상하부·갑상샘 등 다양한 호르몬 분비기관이 있으며, 여기서 50여 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분비돼 각각 신체의 성장 및 성숙과 각종 대사 활동들을 조율하고, 기분과 감정 변화를 일으키며, 식욕과 성욕 및 기타 욕구들을 조절하며, 면역반응까지 관장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리고 이런 물질들을 일컬어 ‘자극하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호르몬(hormone)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세크레틴의 발견으로 시작된 20세기는 인체에서 분비되는 새로운 호르몬을 찾아내고, 이들의 기능을 알아내며, 이로 인한 질병을 밝혀내고, 치료법을 찾아내는 일련의 과정들의 반복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났다. 초기에는 사람이나 동물의 몸에서 존재하던 호르몬을 추출해 사용하는 방법이 제시됐지만, 절대적 공급 부족과 이로 인한 경제적 부담과 윤리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이 과정에서 제공자의 질병이 전염되는 심각한 문제도 발생했다. 1960년대에 있었던, 시신의 뇌하수체에서 추출한 인간 성장 호르몬 제제로 왜소증 치료를 받던 아이들 수십명이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에 걸린 비극은 호르몬 치료가 드리운 가장 짙은 그늘이었다. CJD에 걸리면, 뇌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리고 1년 이내에 사망한다. 다행히 과학자들은 인간의 몸속에서만 분비되던 호르몬을 인공합성하거나 유전자 재조합 미생물에게 대신 만들어내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 비극의 대물림을 막았다.
호르몬 치료의 현재와 미래
현재 전 세계 호르몬 제제의 시장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고, 앞으로도 더욱 늘어날 것으로 짐작된다. 1961년 처음 개발된 피임약 시장은 2023년 기준 185억 7000만 달러로 늘어났으며,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 시장은 2021년에만 203억 5000만 달러에 달했다. 왜소증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인간 성장 호르몬 치료(2022년 기존, 53억 달러)와 갱년기 여성들의 건강을 위해 처방되는 호르몬 대체요법(2023년 기준, 129억 9000만 달러) 시장도 엄청난 규모를 이루고 있다. 글로벌 경제단체들은 이들 호르몬 치료제의 시장은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분야별로 해마다 1.5~5%씩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평균 수명의 증가와 생활 방식의 변화, 건강에 대한 욕구 증진이 호르몬 치료제 시장을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호르몬 치료가 보편화하면서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까지는 타고난 기질이나 노력의 부족 등 개인의 탓이라고 여겼던 많은 것들이 실상은 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라는 생각이다. 이런 시각의 변화는 부정적인 증상에 대해 개인에게 지나친 책임을 지우던 관행에서 벗어나 꼭 필요한 도움을 받도록 돕는 긍정적 변화와 동시에, 정도를 조금이라도 벗어난 행동들을 개인의 다양성이 아니라 호르몬 치료를 통해 교정받아야 하는 병적 증상으로 확대하는 과도한 대응까지 다양한 결과들로 이어졌다. 이런 극단적인 개념의 변화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여전히 호르몬의 그것과 같을 것이다. 애초에 호르몬은 인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시스템이 균형을 맞춰 제 기능을 하도록 조율하는 물질이다. 모자란 것도 지나친 것도 아닌 딱 적절하게 균형을 잡는 것, 그것이 호르몬의 역할이자 호르몬 치료의 개념인 동시에 호르몬의 조절을 받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어야 할 것이다.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경찰 간부들은 계륵이야” 뇌물 풀세트 다섯 곳은 여기 | 중앙일보
- "산책 나갔다가 몸에 500마리"…'팅커벨' 사라지자 '이 벌레' 습격 | 중앙일보
- 말기암 완치, 또 말기암 걸렸다…'두 개의 암' 생존자 이야기 | 중앙일보
- 박진영 "시혁이 써먹겠다"…방시혁, 기타 치면서 깜짝 등장 | 중앙일보
- 박세리 대전 집 경매 나왔다…직접 설계했다는 '나혼산' 그 건물 | 중앙일보
- [단독] '세한도' 기부 때도, 하늘 갈 때도 "알리지 말라"…기부왕 손창근 별세 | 중앙일보
- 아이유 사는 130억 고급빌라…10명 중 8명이 현금 내고 샀다 | 중앙일보
- '이범수와 파경' 이윤진, 발리서 호텔리어 됐다 "새롭게 시작" | 중앙일보
- 30대 남성 보호사가 50대 여성 몸 올라타 폭행…정신병원 CCTV 충격 | 중앙일보
- 김호중, 음주 뺑소니 35일 만에 합의…택시기사 "운전 생각 없어"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