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늦은 때란 없습니다
[이정희 기자]
▲ 내가 섬이었을 때 |
ⓒ 월천상회 |
조경숙 작가의 그림책 <내가 섬이었을 때>도 외로이 떠 있는 섬으로 시작됩니다.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서 시나리오를 공부하고 한국일러스트레이션 학교에서 그림책을 공부한 작가답게 바다와 섬의 질감을 고스란히 살려낸 그림에 생각의 깊이를 더한 글밥이 보는 이의 마음을 잔잔하게 울립니다.
그래도, 다리를 놓아보아요
'바람이 세차게 불던 날/ 난 혼자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리를 놓아가기 시작했지요.'
상투적인 비유지만, 사람 인(人)이라는 한자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지는 획을 또 다른 획이 버티어 주듯이 우리는 고달픈 세상을 건너며 '관계'라는 다리에 기대어 보고자 합니다.
▲ 내가 섬이었을 때 |
ⓒ 월천상회 |
하지만 생각보다 나를 버티어 주는 '관계'는 드뭅니다. '내가 다리를 놓아간다고 해서 저쪽에서도 다리를 놓아오는 건 아니'었지요. 마주 놓아 간다고 해서 꼭 맞닿은 것도 아니'었고요.
한번에 여러 다리를 놓아보면? '튼튼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튼튼'하게 놓으려 하다보니 오래 걸렸어요. 마치 안개 속을 헤매이듯 '멈추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네요. 이렇게 보니 다리를 놓으려 이리저리 애써보는 섬의 시행착오가 우리가 살아온 시간처럼 여겨져요.
섬에서 자라라는 삐죽삐죽 선인장이 눈에 띄어요. 되돌아 보면 시행착오의 많은 부분들이 선인장의 돋아난 가시와 같은 것들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어지고 싶어하면서도 방어적인 그 아이러니함이 바로 미숙한 관계의 민낯이 아닐런지요.
나는 혼자 있기로 했어요. /그러면 싸울 일도, 화낼 일도 없을 테니까요.
▲ 내가 섬이었을 때 |
ⓒ 월천상회 |
괜찮냐고 물어보던 갈매기들마저 사라지고 얼어붙어버린 섬, 싸울 일도 화낼 일도 없으면 편할 것 같은데 추워서 자꾸 움츠러들어요. 삐죽대던 선인장마저 견뎌낼 수 없네요.
무언가 따끔따끔한 것이 나를 깨웠어요. / 메마른 섬에서 날아온 모래였어요.
지쳐보이는 섬에서 날아온 모래에 눈을 뜬 어느 날, 그래요, 나만 얼어붙은 줄 알았는데, 저 섬은 메말라 가고 있네요. '한참을 망설이던' 섬은 '다시 다리를 놓아갔어요'. 드디어 다리가 섬에 닿았을 때 그 섬은 나를 얼어붙게 만든 그 얼음으로 '생기를 되찾았어요. 놀랍게도 섬은 이제 더는 춥지 않아요.
알고보니 혼자인 줄 알았는데 혼자인 섬은 없었다고, 그림책은 바닷속 깊은 곳에 서로 서로 연결되어있던 섬을 그려냅니다. 이런 걸 '인연'이라고 하는 걸까요?
'당신이 지쳐/ 자신이 작게만 느껴지고/ 눈물 고일 때/ 당신 곁에서 그 눈물 닦아드리리다.(중략) / 힘든 때가 닥치고/ 친구 하나 없어도/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 드리리다. ( 사이먼&가펑클 노래, The bridge over troubled water)
▲ 큰늑대 작은 늑대의 별이 된 나뭇잎 |
ⓒ 시공주니어 |
언제라도, 선물이 되는
결국은 다리로 이어진 두 섬의 이야기를 보니 올리비에 탈레크가 그림을 그리고 나딘 브룅코숨이 글을 쓴 사랑과 관계에 대한 우화 <큰 늑대 작은 늑대> 시리즈의 한 권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큰 늑대 작은 늑대의 별이 된 나뭇잎>입니다.
화창한 봄날, 작은 늑대는 곱고 부드러운 연두색 나뭇잎을 맛보고 싶었지요. '큰 늑대야, 저 나뭇잎을 따다 줘', 큰 늑대는 뭐라고 했을까요? '기다려 봐, 때가 되면 떨어질 거야.'
여름이 돼서 짙어진 나뭇잎도, 가을의 고운 갈색으로 물든 나뭇잎도 작은 늑대는 가지고 싶다 했지만 그때마다 큰 늑대는 '곧 떨어질 거야'라고 답했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작은 늑대가 따다달라던 나뭇잎은 추운 겨울이 되어서도 여전히 굳건하게 매달려 있었어요. 이제 작은 늑대는 더는 큰 늑대에게 나뭇잎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눈 내린 어느 날 비로소 큰 늑대는 나무 위에 오릅니다. 그런데 눈이 내린 나무 위에 올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발을 디딜 때마다 작은 가지들은 뚝뚝 부러졌어요. 심지어 미끌미끌한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리다 떨어질 뻔하기까지 했어요. 미소를 짓던 작은 늑대는 나뭇잎 한 장 때문에 이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드디어 큰 늑대는 작은 나뭇잎을 잡으려는데,
그만 작은 나뭇잎은 큰 늑대의 손가락 사이에서 산산히 부서져버렸습니다. 허무한 엔딩? 저물어 가는 햇빛 속에서 별처럼 쏟아지는 나뭇잎들을 맛보고 느낀 작은 늑대, '그렇게 예쁜 것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어', 모지스 할머니의 책 제목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가 떠오르는 엔딩입니다.
둘은 어긋날 때가 더 많았지요. 함께 하는데도 엇갈리는 다리 같기도 하고, 마저 이어지지 못한 다리 같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도록, 가지고 싶다던 소망을 더는 입 밖에 내지 않을 때까지 말이죠.
어쩌면 큰 늑대의 시도는 너무 늦었을 지도 모르고, 바스라지는 나뭇잎을 보고 작은 늑대는 '이게 뭐야' 했을 수도 있지요. 그래도 큰 늑대는 애를 썼고, 작은 늑대는 그 노력에 정말 예쁘다며 화답했습니다. 별처럼 아름다운 건 늦었다 포기하지 않고 눈 덮인 나무 위를 올라간 큰 늑대의 애씀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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