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과 이순신, 흥미로운 갤럽 조사 결과

김종성 2024. 6. 1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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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좋아하는 대통령과 위인들... '사회 개혁' '민족 자주' 선호 경향

[김종성 기자]

지금 한국의 현실은 암담하다. 하지만 다시 좋아지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주는 것이 지난 12일 한국갤럽이 공개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50가지' 조사 결과다.

☞ 한국갤럽 조사 자세히 보기
(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487)

한국갤럽이 3월 22일부터 4월 5일까지 제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만 13세 이상 177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위 50가지 조사 중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 항목의 1위로 뽑힌 인물은 노무현이다. 31%의 응답이 나왔다.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노무현을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밝게 만든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55%

노무현에 대한 지지율은 60대 이상을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성별을 불문하고 1위로 나왔다. 40대 여성과 남성에서는 각각 45%, 50대 남성에서는 41%, 30대 여성에서는 40%가 나왔다. 우리 사회를 실무적으로 움직이는 연령대에서 노무현 지지율이 가장 높게 나타난 것이다.

박정희는 24%, 김대중은 15%, 문재인은 9%로 그 뒤를 이었다. 윤석열은 2.9%, 이승만은 2.7% 박근혜는 2.4%, 이명박은 1.6%, 김영삼은 1.2%, 노태우는 0.4%다. 박정희는 60대 이상 여성에게서 47%, 동일 연령대 남성에게서 51%를 받았다.
  
 2024년 5월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깨어있는시민문화체험전시관(노무현기념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생을 소개하는 특별전시가 펼쳐지고 있다.
ⓒ 김보성
'1위 노무현, 2위 박정희, 3위 김대중' 구도는 2014년과 2019년에 이어 세 번째다. 2004년 조사 때는 박정희 48%, 김대중 14%, 노무현 7%였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서거를 계기로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크게 바뀌면서 노무현이 박정희를 제치게 됐고, 이 구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지지율의 합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에 대한 지지율은 15+31+9로 합계 55%다. 기존 질서를 고수하기보다는 혁신시키는 쪽에 무게를 둔 대통령들이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의 대통령은 이승만·윤보선(장면)·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이다. 이들 13명 중의 단 세 명이 나머지 10명의 지지율을 능가했다. 세상을 바꾸는 지도자의 출현을 한국인들이 목말라하고 있다는 증표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향후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가늠케 해주는 지표다.

단죄의 필요성 보여준 박정희 지지율

이번 갤럽 조사는 잘못을 크게 범한 대통령에 대한 단죄의 필요성도 시사한다. 이승만·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지지율과 박정희 지지율의 차이가 그것을 보여준다.

살상과 악행의 정도를 놓고 보면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오십보백보다. 권위주의적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승만과 전두환의 지지율은 노태우·이명박·박근혜와 크게 다르지 않는 반면, 박정희의 지지율은 이들과 확연하게 다르다.

이승만은 재판정에는 서지 않았지만, 1925년에 임시대통령 탄핵을 받은 데 이어 1960년에 4·19혁명을 당했다. 사법적 단죄보다 훨씬 강력한 국민적 단죄를 받은 것이다. 거기다가 그해 5월 29일 새벽 김포공항에 도착해 하와이로 도주한 일로 인해 죄인의 이미지가 더욱 굳어졌다. 전두환·노태우와 이명박·박근혜는 각각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재판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어떤 형태로든 단죄를 받았다는 점에서 이승만·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는 한 부류다.
  
 1973년 10월 1일 25주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카드섹션으로 나타낸 박정희 대통령의 얼굴이 보인다.
ⓒ 위키미디어 공용
박정희는 이승만·전두환과 다를 바 없는데도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박정희 때 육성된 재벌들이 지금까지 한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공식적인 단죄를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정희가 시민혁명에 굴복하는 모습이나 죄수복 차림으로 법정에 서는 장면이 연출됐다면, 친재벌 지식인들이 그에 관한 호의적 평가를 유포시키기가 훨씬 어려워진다. 잘못을 크게 범한 대통령은 반드시 단죄받도록 해놓아야 이런 인물이 나중에 존경을 받는 엉뚱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 위의 지지율 차이는 대통령에 대한 단죄가 일반 국민에 대한 단죄보다 훨씬 엄격해야 할 이유를 시사한다.

윤석열 정부가 지난 2년간 역점을 기울인 것은 이승만 띄우기다. 그래서인지 2004년 1.0%, 2014년 0.8%, 2019년 0.9%였던 이승만 지지율이 이번에는 2.7%가 됐다. 그러나 2.7%뿐이다. 4·19혁명과 하와이 망명은 이승만 지지율 상승을 막는 요인이다. <건국전쟁> 같은 엉터리 영화를 몇백 번 고쳐 틀어준다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큰 잘못을 범한 대통령에 대한 단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존경하는 인물의 공통점은 '자주성'

그런데 '한국인이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 항목만으로는 한국인이 선호하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충분히 도출하기 힘들다. 표본이 13명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그나마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돼 역대 대통령 지지율만 갖고는 한국인의 지도자관을 제대로 알아내기 어렵다.

한국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50가지' 내의 또 다른 항목인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은 그런 면에서 유용하다. 이 항목은 지금까지 등장한 인물들 중에서 누가 얼마나 존경 받는지를 보여준다. 이 조사의 결과는 이순신 14%, 세종대왕 10%, 박정희 7%, 노무현 4.5%, 김대중 4.4%, 김구 4.4%, 부모님 4.3%, 정주영 4.1%, 안중근 4.0%, 유관순 3.4%로 나타났다.

한국인들이 이순신을 존경하는 것은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땅을 지켰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위인을 존경하는 것은 그 위인이 우리 시대의 과제 해결에 시사점을 주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인들이 이순신에게 끌리는 것은 그가 상대한 외세가 오늘날의 한국에도 위협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에 미치는 위기감이 유지되는 한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은 지금처럼 이어질 공산이 크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 정진오
 

한국인들이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것은 그가 중국 문자에 맞서 훈민정음을 창제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한자뿐 아니라 영어를 배우지 않고도 살아가는 데에 별 지장이 없게 해준 위인이 세종이다. 한글이 한국 공용어 지위를 잃지 않는 한 세종에 대한 존경심은 유지될 수밖에 없다.

이순신과 세종에 대한 존경심에서 공통으로 표출되는 것은 자주성이다. 외세로부터 우리 땅을 지키고 외국 문자로부터 우리 글을 지킨 위인들이 상위 1,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인들이 지도자를 평가할 때 자주성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6위 김구, 9위 안중근, 10위 유관순에 대한 지지율도 맥락을 같이한다.

제국주의 가해자였던 국가에서는 민족 자주성을 주장하는 쪽이 보수나 우파로 분류되지만, 한국처럼 외세의 지배로 고통을 겪은 국가에서는 자주성을 외치는 쪽이 진보나 좌파로 통한다. 위 조사 결과는 한국인들이 위인 평가에서 자주성을 중시하고 있으며 이런 경향이 한국 사회의 정치적 역동성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 대통령들이 지지율 과반수를 차지했다.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에서는 자주성과 연관되는 인물이 10위권에 대거 포진했다.

한국인들이 이런 인물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들을 닮은 인물들이 앞으로도 국민의 선택을 받고 대한민국을 그런 방향으로 끌어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역동적 미래를 전망케 해주는 일이다.

한국갤럽 조사는 13세 미만인 국민들과 제주도에 사는 국민들을 빼고 진행됐다. 이 국민들도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 조사에서 드러난 한국인의 인식 구조는 한국의 미래가 결코 어둡지 않다는 희망적인 전망을 갖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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