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재킹’, 배우 하정우에게서 알 파치노가 보인다 [홍종선의 명장면⑭]

홍종선 2024. 6. 16. 12: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배우 하정우 ⓒ이하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키다리스튜디오 제공

배우나 감독의 인터뷰 질문지를 준비하면서 꼭 넣는 물음이 있다.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당신의 ‘정체성’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배우나 감독, 그 개별에 따라 당연히 다른 질문들을 뽑으면서도 매번 빼놓지 않는 이유는 아티스트 스스로 내가 어떻게 걸어왔고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가 가장 궁금해서다.

감독이나 배우나 선택되는 사람이어서, 직접 시나리오부터 쓰는 감독이라 하더라도 관객을 만날 수 있는 작품에는 선택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보니, 자신들의 필모그래피를 ‘온전히’ 의도적으로 짜맞추기란 어렵다. 그러함에도 신기하게, 경력이 쌓인 아티스트의 과거작들을 살펴보면 ‘방향성’이라는 게 보인다. 방향성은 정체성을 형성하고, 정체성을 방향성에 나침반 역할을 한다.

바보 같은 질문인 줄 알면서도 그 방향성, 정체성에 본인의 의지가 얼마큼 투영됐는지가 알고 싶어 던진다. 아니, 정체성을 어떻게 고민하고 가다듬으며 작업하고 있는지가 궁금한 것일 테다.

단독 인터뷰의 시대는 가고 많게는 스무 명이 자리한 라운드 테이블에서 만나다 보니, 그 질문을 못 할 때도 있다. 인터뷰의 흐름이 이와 멀어지면 굳이 판을 깨고 싶지 않아서다. 또, 인터뷰 질문지에는 당신의 정체성을 물으며, ‘저 개인적으로는 이러이러하게 생각하는데요’가 뒤에 붙어 있는데. 간혹 인터뷰이(interviewee, 인터뷰 받는 사람) 중에는 뒤를 듣기도 전에, ‘그건 기자님들이 생각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한 반격은 굉장한 유쾌함을 안긴다. 맞다, 그걸 행하는 직업이 기자다.

영화 ‘하이재킹’은 ‘탑건: 매버릭’의 쾌감으로 시작해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의 감동으로 끝난다 ⓒ

사실, ‘하이재킹’(감독 김성한, 제작 퍼펙트스톰필름·채널플러스 주식회사, 배급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키다리스튜디오)의 주연 하정우에 관한 인터뷰 준비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시작됐다. 오랜 시간 우리 곁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미 여러 차례 인터뷰한 배우에게 건넬 질문을 생각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2003년 데뷔작 ‘마들렌’부터 오늘의 ‘하이재킹’에 이르기까지 마흔 편이 넘는 영화를 살펴봤다. 어찌나 다양한 장르들에서 개성적 캐릭터 변주를 보여줬는지 하나의 ‘궤’로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확실한 건 대중에게 큰 사랑 받은 배우라는 것. 배우 송강호가 52세에, 황정민이 49세에 해낸 ‘1억 관객 배우’를 41세에 해내며 그 앞에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내놓는 작품마다 사랑받는 배우, 흥행 경쟁 최고 시기에 선발투수로 내놓는 배우…배우 하정우에 관한 사실적 특징이기는 해도 ‘정체성’이라고 하기는 아쉽다.

그래서 아직도 못 찾았느냐고 재촉하시는 독자의 핀잔이 귓전에 들린다. 배우 하정우의 정체성을 질문지에 적어놓기 위해 애썼던 시간부터 영화를 보고 질문지를 수정하고, 드디어 인터뷰한 뒤 이 글을 적기까지 기자는 두 번의 자기반성을 겪었다. 그것을 실토하는 과정이 배우 하정우의 정체성에 다가가는 길이어서, 이리 난삽한 글로 적어가는 중이다.

영화 ‘추격자’의 지영민, 전무후무의 연쇄살인마 캐릭터를 탄생시킨 배우 하정우 ⓒ㈜쇼박스 제공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동안 배우 하정우의 정체성에 대해 지니고 있던 생각에 갇혀 있었다. 무식하게 간단히 줄여 말하면 ‘한국의 로버트 드 니로’. 작품마다 볼 맛 나는 캐릭터를 내놓았다. 같은 군인이어도(용서받지 못한 자, 유태정), 같은 연쇄 살인마여도(추격자, 지영민), 같은 청부살인자(황해, 김구남)여도, 같은 조폭 보스여도(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최형배), 같은 북한 첩보원이어도(베를린, 표종성) 한국영화사에서 본 적 없는 개성으로 빛났다.

호스트바에서 ‘선수’들을 소개해도(비스티 보이즈, 유재현), 빚 받으러 온 전 여친과 온갖 여자들에게 돈 꾸러 다녀도(멋진 하루, 조병운) 군색함 없이 매력이 넘쳤다. 멜로의 주인공이 돼도 왕자님보다 지질남으로 등장하고(러브 픽션, 구주월), 액션 활극을 펼쳐도 머리는 모자라고 힘만 넘치는 빡빡이가 되고(군도: 민란희 시대, 도치), 아빠가 돼도 남의 씨를 제 자식으로 품고 옹색하게 부글대는 게(허삼관, 허삼관) 참으로 남달랐다.

2시간을 오롯이 책임지며 실시간 생중계 재난 영화를 찍다가도(더 테러 라이브: 윤영화), 배역 크기 가리지 않는다는 철학을 확인시키듯 조연으로 등장해 신사의 멋을 아는 스나이퍼로(암살, 하와이 피스톨), 노비 출신의 귀족적 사기꾼으로(아가씨, 백작) 작품을 빛냈다.

결코 윤리적이나 도덕적이라 할 인물이 아니거나 훌륭한 인품이라기보다 좀 얄미운 구석이 있는 캐릭터들인데, 하정우가 ‘맛있게’ 표현하니 호감형 캐릭터가 되어 관객의 마음을 훔쳤다. 마치 이탈리아 남자가 한국말을 기막히게 잘하면서 우리의 스크린을 활보하는 느낌, 배우 하정우의 행보는 예측불허였고 표현은 처음 맛보는 신선한 풍미였다.

온 국민이 이정수 씨의 귀환을 염원했던 영화 ‘터널’ ⓒ㈜쇼박스 제공

그리고. 당시엔 눈치 못 챘지만 2016년 개봉한 영화 ‘터널’을 시작으로 캐릭터에 변화가 왔다. 붕괴한 터널에 갇힌 상황에서도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애잔한 생존기를 이어가는 ‘터널’의 이정수, 이승에서의 대죄를 안고 그 벌과 만회의 기회로 1000년간 죽은 자의 변호사로 살아온 ‘신과 함께’의 강림, 전역을 불과 하루 앞두고 만삭인 아내를 둔 채 폭발을 시작한 백두산으로 가야 했던 ‘백두산’ 특전사 대위 조인창으로 우리에게 왔다.

흙을 뒤집어쓰고 광선검을 들고 역대 최고의 CG와 함께 연기하는 새로움보다 크게 보인 건 캐릭터 변화였다. 톡톡 튀는 개성보다 따뜻함이 큰 인물들이었다. 함께 갇힌 강아지와 물을 나눠 마시고 다른 생존자를 돕는가 하면 일 개인보다 대의를 중시하는 인물로, 흔들림 없이 원칙을 사수하는 인물로 시동을 걸었다.

김윤석과 하정우(왼쪽부터), 두 명배우의 밀고 당기는 기(氣) 대결이 짜릿했던 영화 ‘1987’의 명장면 ⓒCJ ENM 제공

이후 영화 ‘1947 보스톤’에서 세계대회 첫 출전의 서윤복을 조국의 독립을 만방에 알리는 보스튼마라톤대회 우승자로 키우는 손기정, ‘1987’에서 스물두 살 대학생이 고문 중 사망한 사건을 단순 쇼크사로 축소·은폐하려는 세력에 맞서 진실의 물꼬를 트는 공안부장 최 검사, ‘비공식작전’에서 중동 테러 집단에 납치·억류된 동료를 구하러 현지에 급파돼 갖은 역경 끝에 구출해내는 김민준 사무관을 거쳐 이번 ‘하이재킹’에서는 공중 납치된 여객기의 부기장 태인을 맡아 침착한 리더십과 숭고한 희생으로 승객들의 안전을 도모한다.

모두 실존 인물이다. 배우 하정우는 1947년 태극기를 선수의 가슴에 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보스톤마라톤대회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를 계기로 터져 나온 민주화 열기에 뜨거웠던 그 현장으로, 1986년 레바논 한국인 외교관 납치 사건 속으로, 1971년 공중 납치돼 북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F27기 안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영화 ‘하이재킹’을 관람하고서야 ‘터널’ 이후 시작된 캐릭터 변화가 여실히 다가왔다. ‘1947 보스톤’을 연출한 강제규 감독의 “배우 하정우는 안중근 의사를 맡겨도 해낼 배우”라는 말을 실감했다. 그래서, 질문지를 고쳐 적었다. 캐릭터 변주 달인으로만 봤는데, 이제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제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며 성실히 일하는 사람이 당신에게 맡겨진다. 심지어 역사적 인물을 연기한다. 배우의 진화가 보인다. 나이 듦에 따라 맡겨지는 역들이 그 품성에 따라 일정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누군가를 돕고 구하는 인물들로 캐릭터가 위대해지고 있다. 스포일러라 적을 수 없지만 ‘하이재킹’에서는 그 정점이다. 이 부분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나요?

영화 ‘하이재킹’으로 인터뷰에 나선 배우 하정우 ⓒ이하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코리아㈜·㈜키다리스튜디오 제공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정리해 주시니 놀랍네요. ‘난 이런 흐름으로 가야지’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우연적 흐름이네요. 흐름이 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아가씨’ 후부터 대의 있는 정의감 있는 캐릭터를 맡고 있다는 말씀, 그때 제작된 영화들이 제게 맡겨진 캐릭터들이 그때 당시의 주요 이야기들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게 주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이재킹’에서는 주어진 상황 자체가 분명해요. 납치범이 날뛰고 있고, 비행기가 이북 넘어가는 상황이고, 나는 어떻게 막을 수 있나를 고민하고 있고. 그것들에 대한 리액션을 잘 표현해야겠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용대(여진구 분)가 처음 협박할 때 나는 어떻게 리액션 할 것인가, 동일 형이 맡은 기장과는 어떻게 얘기하고 헤쳐 나갈 것인가, 채수빈(옥순 역)이 오면 함께 어떻게 승객들을 안심시키고 안전하게 지킬 것인가 생각하며 차곡차곡 리액션을 쌓아갔습니다.”

“제가 그렇게(숭고하게) 보였다면 연출의 힘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생각해 보면, 머릿속은 복잡하고 가슴은 뛰겠지만 겉으로는 차분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절제하는 연기를, 덜 표현하는 연기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에서 태인에게 바라는 방향성과 잘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정우에게 맡겨지는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배우의 진화를 보았다는 뜨거운 질문에 돌아온 겸손하고 차분한 대답. 하정우는 연기처럼 말도 참 아껴서, 절제해서 한다. 진화라는 평가에 자신은 주어지는 역할들에 대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연기해 왔을 뿐이라고 답한다.

태인 캐릭터가 위대함의 최고조에 달했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연출의 힘이 우선이고, 만일 제가 무엇을 한 게 있다면 상황으로 들어가 함께하는 배우들과 액션-리액션을 차곡차곡 주고받으며 쌓은 것뿐이고. 마침 위기에 차분하려 하고 덜 표현하는 연기를 지향하는 하정우의 특성이 ‘하이재킹’ 그리고 태인에 딱 맞은 덕분이란다.

맞다, 시나리오를 받아 읽고, 제안받은 캐릭터를 수락하고, 숙고를 통해 현장에서 연기를 펼치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다양한 스태프의 여러 장치 및 표현과 더불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소인수 분해해 들어가면 ‘액션과 리액션의 연속’만이 남는다.

배우 하정우에게서 알 파치노를 보았다 ⓒ

되짚어보니 배우 하정우는 신인 시절부터 하정우보다 캐릭터, 캐릭터보다 작품을 우선한다고 말해 왔다. 내가 빛나는 보이는 것보다 캐릭터만 돋보이는 것보다 작품이 재미있는 게 관객을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런데 기자는 하정우가 스크린에 펼쳐 보이는 캐릭터들의 황홀한 개성에 마음을 뺏겨 계속 캐릭터를 생각해 왔다. 데뷔 22년 차 작품을 놓고 인터뷰를 준비하면서도 내리 캐릭터 변천사를 정리했다. 첫 번째 반성이다.

두 번째 반성은 짧게 요약할 수 있다. 로버트 드 니로를 지향하는 배우인 줄 알았는데, 알 파치노였다. 재기발랄하게 캐릭터 변주에 힘쓰는 드 니로가 아니라 상황 안으로 들어가 그 인물이 되어 움직이는 파치노처럼 연기하는 하정우임이 이제야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캐릭터들, 그 결과에 집중한 통에 로버트 드 니로형 배우라고 단정했다. 그가 들려주는 메이킹 스토리, 표현의 사유에 귀 기울이니 배우 하정우에게서 알 파치노가 보인다.

그렇다고 혼자 상황에 빠져 연기하지도 않았다. 혼자 튀지 않는 담백한 연기, 작품을 든든히 받치는 표현력으로 동료 주연배우뿐 아니라 기내의 오십여 조·단역 배우들에게 곁을 내주고 기회의 장을 열어 주면서 함께한 모습이 영화 ‘하이재킹’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웃음기 지운 성동일, 뜨겁게 타오른 여진구, 특유의 맑은 에너지로 영화 무드의 침체를 막는 채수빈, 신인답지 않게 여백 있는 연기를 한 문유강은 어느 때보다 무게감 있게, 새롭게 반짝인다. 이 영화에서는 기내 승객이지만 각자의 분야에선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부기장 태인을 바라보는 눈에 신뢰가 깃들어 있다.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에서 임솔(김혜윤 분)이 일하는 본시네마 대표 이경자보다 100배 임팩트 강한 연기를 펼친 검사 어머니 역의 전영, 유창한 강원도 사투리로 소심 눈물 연기를 펼친 새 신랑 역의 김철윤 등을 비롯해 이루 언급하지 못한 배우들까지 승객들의 혼연일체 연기가 영화의 실감을 높인다.

배우 모두가 하나 된 ‘덩어리’의 힘을 보여주는 영화 ‘하이재킹’ ⓒ

몇 분의 관객이 보시고 나면 ‘하이재킹’에서 배우 하정우가 진심을 쏟은 명장면, 두 팔로 비행기 조종관을 잡는 모습에 관해 얘기할 수 있을까. 연극 연습처럼 리허설 많이 한 현장에서 하정우는 시나리오에 없던 방식으로 연기했고, 눈물을 참기 어려운 압도적 장면이 빚어졌다.

우선 말할 수 있는 건, 어떤 작품보다 출연 배우 모두가 ‘덩어리’로 하나 된 결합력이다. F27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 그 명연기들을 지켜보다 보면 목도할 것이다, 배우 하정우 캐릭터 변천사의 정점이라고 쓰다가 영화 ‘하이재킹’을 넘어 재난영화사의 명장면이라고 평가받을 그 장면을.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