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향한 벤탄쿠르의 망언, 이건 농담거리가 아니다
[이준목 기자]
▲ 토트넘 홋스퍼의 로드리고 벤탄쿠르 |
ⓒ 로이터/연합뉴스 |
손흥민의 팀 동료인 로드리고 벤탄쿠르의 인종차별성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벤탄쿠르가 그동안 팀 내에서 손흥민과 절친한 사이로 알려졌던 데다, 심지어 문제의 발언이 손흥민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더욱 충격적이다. 벤탄쿠르는 논란이 커지자 SNS에서 사과했지만 해외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벤탄쿠르는 지난 14일(현지시간) 자국인 우루과이의 한 방송에 출연했다. 진행자가 팀 동료의 손흥민의 유니폼을 부탁하자, 벤탄쿠르는 장난스럽게 "소니(손흥민의 애칭)의 사촌 유니폼은 어떨까. 그들(동양인)은 거의 비슷하니까"라고 말했다. 서양인의 입장에서 '(동양인의) 외모가 비슷해서 구분이 안 간다'는 것은 대표적인 인종차별성 표현이다.
벤탄쿠르의 망언은 온라인을 통해 해외에도 빠르게 퍼졌고 영국과 한국에도 알려지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상황을 확인한 벤탄쿠르는 지난 15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손흥민을 직접 태그하며 사과하는 글을 올렸다. 벤탄쿠르는 '나의 형제인 소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사과할게, 그건 그냥 아주 나쁜 농담이었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 알지? 그리고 나는 너에게 또는 다른 누구에게도 무례하게 굴거나 상처를 주지 않을 거야! 사랑해 형제!"라고 썼다.
그나마 사과한 것은 다행이지만, 여전히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다. 현재 축구계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인식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벌어진 일이라는 점, 하물며 소속팀 동료를 대상으로 했다는 점, 농담이라는 변명만 강조하며 정작 인종차별성 발언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이 결여된 사과라는 이유 때문이다.
벤탄쿠르가 이 사건으로 공식적인 징계를 받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FA)는 최근 인종차별에 대하여 엄격한 처벌을 강조하고 있으며 공식 규정을 통하여 '인종, 피부색, 민족에 대한 불필요한 언급을 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경기장 안에서 만이 아니라 밖에서 벌어진 언행에도 적용된다.
벤탄쿠르와 비슷한 사례로 2019년 9월 맨체스터 시티의 베르나르두 실바는 자신의 SNS에 당시 팀 동료였던 흑인 선수 벵자멩 맹디(현 FC로리앙)의 피부색을 빗댄 농담성 게시글을 올렸다가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실바와 펩 과르디올라 맨시티 감독은 친구들끼리의 악의없는 장난이라고 해명했고, 멘디도 괜찮다며 실바를 옹호해줬지만, 잉글랜드 축구협회는 결국 실바에게 1경기 징계와 5만 파운드(약 7,5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헸다. 벤탄쿠르 역시 징계가 내려진다면 이와 비슷한 수준이 될 전망이다.
손흥민과 토트넘 구단은 아직까지 벤탄쿠르의 발언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세계의 축구 팬들과 외신들은 하나같이 벤탄쿠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손흥민은 한국과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이고, 토트넘의 주장이기도 하다. 이러한 손흥민조차 인종차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모든 아시아 선수들이 언제든 인종차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에 더욱 문제적인 대목이다.
한편으로 벤탄쿠르만이 아니라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일부 중남미 선수들의 반복적인 문제행동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벤탄쿠르와 같은 우루과이의 레전드인 루이스 수아레스는 리버풀 시절인 2011년, 맨유와의 경기 중 파트리스 에브라(프랑스)에게 '니그로(검둥이)'라는 인종차별 발언을 한 혐의로 영국축구협회(FA)로부터 8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또다른 우루과이 선수인 페데리코 발베르데는 2017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FIFA U-20(20세 이하) 월드컵 당시 득점을 터뜨리고 양손으로 눈을 찢는 아시아인 인종차별 세레머니를 하는가 하면,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전에서는 이강인에 거친 태클을 저지르고 주먹 지르기 세리머니를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17년 한국에서 평가전을 치른 콜롬비아의 미드필더 에드윈 카르도나는 한국 선수들과 신경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역시 양손으로 자신의 눈을 찢고 입을 벌리는 인종차별 제스츄어로 도발한 일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가해자들 대부분이 징계를 받고도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반성이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수아레스는 에브라에게 햇던 '니그로'라는 단어가 우루과이에서는 인종차별의 표현이 아니라며 이후로도 억울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눈찢기 제스츄어를 했던 발베르데는 아시아인들을 겨낭한 게 아니라 친구들에게 보내는 세리머니였다고 변명했다.
벤탄쿠르의 망언만 해도, 선수가 문제의 발언을 할 때 진행자는 같이 맞장구를 치며 웃기만 했고 제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방송은 아무런 편집이나 해명도 없이 그대로 고스란히 전파를 탔다. 벤탄쿠르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주변 환경이나 우루과이의 공식 방송에서조차 인종차별성 언행에 대한 경각심이나 문제인식 자체가 아예 없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대목이다.
벤탄쿠르의 발언이 알려진 이후, 다수의 우루과이 팬들은 사과의 뜻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일각에서는 악의 없는 농담일 뿐이었다며 벤탄쿠르를 옹호하는 우루과이팬들도 있었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결코 농담이나 장난의 소재가 될 수 없으며, 그런 식으로 미화되어서는 더욱 안 된다.
한편으로 이번 벤탄쿠르 사건은 한국에서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정확히 1년 전인 2023년 6월, 프로축구 K리그 울산 HD 소속의 선수들과 관계자가 SNS상에서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다가 피부색과 특정인종, 외국인 선수의 실명을 빗댄 저급한 인종차별성 발언을 한 사실이 적발되어 프로연맹의 징계까지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가해자들도 그 시작은 '농담과 장난'에서 비롯됐다고 변명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동양인들이 받는 차별에는 민감했지만, 정작 우리 사회 내부에서 외국인에 대한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에는 둔감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울산 선수들이 사살락(태국)의 피부색을 농담의 소재로 삼았던 것과, 벤탄쿠르가 손흥민과 동양인의 외모를 두고 농담을 한 것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
'어디에선가 발생한 불의는, 세상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Injustice anywhere is a threat to justice everywhere).' 평생을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어록이다. 불의는 뭔가 거대한 사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무심코 내던진 작은 담배불씨 하나가 거대한 산불을 초래할수도 있는 것처럼, 더이상 사소한 농담이나 장난이라는 핑계로 일상속의 인종차별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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