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과 기꺼이 마주하는 태도, 이 영화제가 특별한 이유
[김성호 기자]
한국에 있는 여러 영화제 가운데 저만의 멋을 간직한 축제는 생각만큼 많지가 않다. 살펴보면 거기서 거기인 기획, 추릴 수 있는 최선의 작품군을 관객 앞에 내보이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고 말하는 곳이 얼마나 많은가. 공간 또한 마찬가지, 작품을 상영하는 공간이 대부분 본래 극장으로 쓰이던 곳이니 영화제만의 특색을 내보이기 어려운 때가 많다.
그러나 어떤 영화제는 다른 곳에선 만나기 어려운 저만의 색깔을 한껏 드러낸다. 이를테면 '음악'이라는 주제로 벌써 20회차를 맞이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매년 이 영화제는 청풍호 일원에 마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야외무대를 마련하여 음악과 영화가 공존하는 멋스런 풍경을 펼쳐내곤 한다.
▲ 영화 <해피투게더> 포스터 |
ⓒ 무주산골영화제 |
무주산골영화제의 상징 '숲' 섹션
그리고 무주산골영화제다. 아예 극장이 없던 산골마을에서 처음 시작한 영화제니, 상영관 하나하나가 모두 낯설고 특색 있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앞서 적은 여러 영화제의 성공사례를 모티브 삼아 출발한 등나무운동장은 매년 입장권을 구하기도 어려울 만큼 뜨거운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무주산골영화제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상영을 말하자면, 역시 '숲' 섹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덕유산 중턱 따로 무엇도 없는 숲속 공간에서 열리는 야외상영은 가히 짝을 찾기 어려울 만큼 매력적이라 해도 좋겠다. 탁 트인 하늘과 드넓게 뚫린 공간, 자유롭게 여기저기 누워 보는 편안한 분위기까지가 무주산골영화제만이 지닌 멋을 자연스레 내보인다. 해발 700미터 덕유산 중턱에 위치한 대집회장이 상영장으로 쓰이는 가운데, 날이 어둑해지면 별과 함께 자연을 가득 메우는 영화들의 매혹적 사운드가 절로 낭만적 감흥을 일으킨다.
▲ 영화 <해피투게더> 스틸컷 |
ⓒ 무주산골영화제 |
자연과 어우러진 음악과 영상의 향연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숲 섹션 첫날에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 <블루 자이언트>, <크레센도> 등 여러 음악 영화가 배치된 건 바로 이 같은 이유일 테다. 섹션 마지막 날엔 사운드 뿐 아니라 압도적 영상이 들어찬 <듄> 시리즈가 연속 상영돼 관객의 탄성을 자아냈으니, 영화제를 준비한 이들이 상영작을 어떤 기준으로 골랐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모두 3일 동안 진행되는 숲 섹션 두 번째 날은 음악보다는 영상에 치중했다 보아도 좋겠다. 쓰인 음악이 모자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도 영상 미학이 더 높이 평가받는 작품이 배치된 것이다. 특히 이날 마지막 작품, 그러니까 금요일부터 토요일로 넘어가는 시간대의 영화를 왕가위의 <해피투게더>로 채운 건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선택이라 평가해도 좋겠다.
▲ 영화 <해피투게더> 스틸컷 |
ⓒ 무주산골영화제 |
당신의 가슴에 파문을, 왕가위 예술의 힘
4K 디지털 영상으로 변환해 재개봉된 리마스터링 버전이 무주산골영화제 숲 섹션에서도 그대로 상영된다. 세기말의 혼란스런 정서와 웅장한 자연의 어우러짐은 다른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한 감상을 자아낸다.
<해피투게더>가 이번 무주산골영화제 숲 섹션 상영작으로 선정됐단 사실은 여러모로 특별한 감상을 던진다. 그건 이 영화와 이 영화제를 찾는 이들 사이에 어떤 공통적 특성이 엿보이는 탓일까.
이제와 누군가 내게 <해피투게더>가 훌륭한 영화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하지는 못하겠다. 또 누가 내게 <해피투게더>와 같은 작품을 말해보라 하여도 나는 쉽게 답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해 <해피투게더>는 저만의 개성을 간직한 독특한 영화며, 다른 어느 작품을 읽어내는 흔한 독법으로는 명확히 읽히지 않는 특색 있는 영화라는 뜻이다.
▲ 무주산골영화제 포스터 |
ⓒ 무주산골영화제 |
이 영화와 무주산골영화제가 소통하는 방식
이야기가 지닌 매력을 명확히 말할 수 없다 해도 좋겠다. 다른 어느 영화보다 뚜렷하지 않은 서사와 메시지를 가졌대도 괜찮다. 어찌되었든 <해피투게더>는 보는 이를 움직이는 힘을 지녔다. 색감과 구도, 카메라워킹, 왕가위의 특색 있는 연출을 통하여 관객의 마음에 오랫동안 쓸려나가지 않는 인상을 새긴다.
나는 <해피투게더>와 같은 영화를 얼마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무주산골영화제, 극장 하나 없던 시골을 도리어 제 무기로 삼아 성공에 이른 영화제 또한 얼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둘은 영화와 예술, 또 개성을 아끼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 저만의 매력을 확고히 다졌다. 그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가 <해피투게더>를 저의 상징인 숲 섹션에 초청하여 상영한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세기말의 정서와 선명한 색감, 아르헨티나와 탱고, 또 홍콩과 동성애라는 소재까지 모두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다. 예술 애호가란 나와 다른 이들과 만나 제 세계의 지평을 넓히겠단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 아닌가.
멀리 무주 산골까지 찾아와 영화축제를 즐기겠단 이들에게서도 그와 마찬가지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다름을 기꺼이 겪어내고 포용하려는 태도, 무주가 품고 있는 정신이 <해피투게더>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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