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발 ‘픽앤쇼벨’...태양광에 ESS까지 ‘밸류업’ [스페셜리포트]
1800년대 중반. 골드러시가 미국 서부를 강타했다. 하지만 금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 당연히 돈을 번 사람도 소수다. 오히려 뒤에서 웃은 건 금을 캐는 이의 도구인 ‘곡괭이(Pick)’와 ‘삽(Shovel)’ ‘청바지’ 등을 팔던 장사꾼이다. 증권가는 당시를 교훈 삼아 ‘픽앤쇼벨(pick and shovel)’ 전략을 만들었다. 특정 패러다임을 이끄는 기업의 경우 ‘고평가’에 따른 리스크가 존재한다. 큰돈을 벌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반면 패러다임 수혜를 받는 기업은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전략이다.
인공지능(AI) 시대에도 ‘픽앤쇼벨’은 유효하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증하면서 태양광 산업을 향한 관심이 감지된다. 수년 전 한물갔다고 평가받던 때와 상반된 모습이다. 에너지저장장치(ESS)와 액침 냉각 솔루션도 각광받는다. 국내 기업도 때아닌 호재를 누리는 모습이다. 한화솔루션 큐셀 부문(한화큐셀)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카운티에 지은 대규모 태양광 복합단지에서 만들어진 태양광 재생에너지를 메타에 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LG전자 역시 ‘액침 냉각 솔루션’을 AI 데이터센터에 공급할 것으로 알려졌다.
‘전기 먹는 하마’ 데이터센터
빅테크 최애 에너지 ‘태양광’
빅테크의 최대 관심사는 AI 데이터센터다. 데이터센터는 모든 데이터를 저장·유통·처리하는 시스템이다. 쉽게 말해 정보를 한곳에 모아둔 건물이다. 도서관을 떠올리면 편하다. 다만 AI 시대로 접어들며 데이터 양은 늘었고 요구 처리 속도는 빨라졌다. 이에 맞는 데이터센터가 필요해진 상황. 결국 빅테크는 새로운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나섰다. 챗GPT 출시로 AI 시대를 촉발시킨 오픈AI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대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투입 예정 비용만 6년간 1000억달러(약 135조원)다. 아마존도 15년 동안 데이터센터 건설에 1500억달러(약 205조원) 등을 투자할 방침이다.
문제는 AI 데이터센터 전력 소모량이다. 기존 데이터센터보다 더 빠르고, 더 많은 정보를 처리·보관하는 만큼 10배 이상 전력을 필요로 한다. 실제 구글 검색에 필요한 전력은 평균 0.3Wh. 반면 생성형 AI 챗GPT는 2.9Wh의 전력이 요구된다. 강동진 현대차증권 애널리스트는 “AI 가속기 핵심인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여러 코어가 동시에 병렬 연산해 GPU당 전력 소비가 기존 반도체 대비 수배 높다. 또 다수 GPU가 동시 연산해 데이터를 처리하기 때문에 AI 데이터센터는 대규모 전력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도 올해 초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부족한 자원은 전기”라며 “2025년 모든 빅테크의 AI 칩을 구동할 충분한 전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결국 빅테크 입장에서는 추가적인 전력원이 필요한 상황. 이에 각광받는 게 태양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일단 빅테크와 가장 친숙한 신재생에너지다. 글로벌 투자은행 UBS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부터 2023년까지 미국 태양광 수요의 80% 정도가 기업 대상 전력구매계약(PPA) 형태로 소화됐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업 대상 PPA 대부분은 빅테크의 계약이었다. 아마존과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비중이 60%를 넘어섰다. 태양광이 각광받는 또 다른 이유는 빅테크의 재생에너지 사용 정책이다. 빅테크 기업은 글로벌 ‘RE100’을 주도한다. 고객사에도 RE100을 요구할 정도다. RE100은 2050년까지 기업 활동에 필요한 전력 100%를 태양광이나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로 충당한다는 캠페인이다. 강동진 애널리스트는 “태양광은 가장 기본적인 탈탄소 수단인 동시에 빅테크들은 이미 태양광 전력의 최대 구매자”라고 설명했다.
이미 글로벌 투자 시장에서는 태양광이 AI 붐의 최종 승자라는 말까지 나온다. UBS는 최근 보고서에 AI 시대 최대 수혜 기업으로 엔비디아·애플·AMD 등이 아닌 미국 태양광 모듈 업체 퍼스트솔라를 꼽았다. 목표주가도 350달러까지 올렸다. 관련 보고서를 작성한 존 윈드햄(Jon Windham) UBS 애널리스트는 “데이터센터의 향후 잠재적인 신재생에너지 수요에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다. 특히 태양광 프로젝트 수요는 오랜 기간 공급을 훌쩍 넘어설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내 증권가 관계자는 “올해 하반기부터 태양광 PPA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높다. 또 퍼스트솔라 등은 2027년까지 수주 물량이 확보된 상태라고 밝힌 만큼, 2025년과 2026년을 기점으로 더 많은 태양광 기업이 수혜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미중 갈등까지 겹쳐 ‘반사이익’
태양광 수요 증가는 국내 기업에도 ‘희소식’이다.
미국 태양광 시장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 중인 국내 기업은 한화큐셀이다. 한화큐셀은 지난 4월 미국 조지아주 카터스빌 공장의 태양광 모듈 생산라인 건설을 마무리했다. 연간 3.3GW 규모의 태양광 모듈 제조 능력을 갖췄다. 현재는 제품 생산에 돌입한 상태다. 관련 업계는 공장 가동률을 70~80% 정도로 추산 중이다. 이르면 6월, 늦어도 7월 중에는 풀가동이 가능할 전망이다. 카터스빌 공장 확보로 미국 내 한화큐셀의 모듈 생산능력은 연간 8.4GW로 늘었다. 한화큐셀은 지난해 조지아주 달튼 공장을 증설해 1.7GW였던 모듈 생산능력을 5.1GW로 키웠다. 8.4GW는 미국에서 약 130만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규모다.
그간 한화큐셀이 처한 상황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중국산 태양광 저가 공세로 영업 환경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 이에 빅테크 중심 태양광 수요 증가에도 큰 수혜를 입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이 중국산 태양광 관세를 대폭 인상하면서 반사이익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불공정 무역을 근거로 중국산 태양광 관세를 기존 25%에서 50%로 대폭 올렸다. 미국 정부의 이번 조치는 무역법 301조에 따른 것. 이른바 ‘슈퍼 301조’로 불리는 무역법 301조는 교역 상대국의 불공정하거나 차별적인 무역 행위 또는 특정 수입 품목으로 미국 내 산업에 차질이 발생했다고 판단되면 대통령 권한으로 무역 보복 조치를 부과한다는 내용이 적시돼 있다. 동시에 베트남·캄보디아·말레이시아·태국 등 동남아 4개국에서 미국으로 수출되는 태양광 설비의 관세 유예를 종료, 동남아시아를 통한 중국의 태양광 설비 우회 수출도 제한했다.
한화큐셀 입장에서는 미국 태양광 시장 지배력을 높일 절호의 찬스다. 앞선 동남아 관세 유예 철폐도 국내 기업 한화큐셀이 꾸준히 요청했던 사안이다. 이구영 한화큐셀 대표는 “북미 최대 규모 태양광 제조 기지를 바탕으로 프로젝트 개발, 설계·조달·시공(EPC), 전력 공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확대해나가고 있다”며 “글로벌 빅테크를 포함해 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 중인 기업들에 차별화된 통합 그린에너지 솔루션을 제공하는 파트너사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 말처럼 한화큐셀은 최근 빅테크와의 파트너십 소식도 알렸다. 한화큐셀은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50㎿ 규모 태양광 모듈과 ESS로 이뤄진 복합 단지를 완성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전력은 빅테크 메타에 공급된다. 박건영 교보증권 애널리스트는 “올 하반기 미국 내 쌓여 있던 중국산 재고가 소진되고 가격 경쟁이 둔화한다면 국내 태양광 업체의 실적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증권가는 모든 국내 태양광 업체가 수혜를 보기는 힘들다고 본다. 예를 들어 HD현대에너지솔루션의 경우 미국 내 생산시설이 없는 상태다. 전혜영 다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중국 업체 진출이 제한된 미국 시장에서 생산시설을 확보하지 못한 게 HD현대에너지솔루션에 남는 유일한 아쉬움”이라고 설명했다.
ESS도 픽앤쇼벨 수혜
2025년 미국 시장 10조원대
ESS도 빠지면 서운한 AI 수혜 산업이다. ESS는 신재생에너지를 소비하고 남은 전기를 저장하고 필요할 때 송출하는 장치다. 산업용과 가정용을 막론하고 ESS는 태양광·풍력 발전기 옆에 반드시 따라붙는 필수품이다. 최근 가정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서도 태양광 수요가 늘며 ESS가 각광받고 있다. 미국 에너지관리청(EIA)과 시장조사기관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미국 ESS 시장 규모는 2019년 6억9200만달러에서 2025년 82억6100만달러(약 10조원)로 급성장이 예상된다.
현재 ESS 시장을 지배한 곳은 중국 기업들이다. 중국은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앞세워 ESS 시장을 잠식했다. LFP 배터리는 국내 업체의 삼원계(NCA, NCM) 배터리 대비 30~50% 저렴하다. 중국의 LFP 기반 제품이 ESS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배경이다.
국내 기업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이에 LFP 배터리로 맞불 작전에 나섰다. 태양광 수요 증가 등으로 ESS 시장 확대가 분명한 만큼, 자존심 대신 실리를 취하겠다는 심산이다. 삼성SDI는 지난해 말 ESS 사업 확대를 위한 전담 조직을 만들었다. 동시에 ESS용 LFP 배터리 개발에 속도를 붙이고 있다. 삼성SDI 측은 “AI 시장 성장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로 이어지고, 이에 전력 수요 규모는 2030년 현재의 2배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다”며 “전력 수요 증가에 따른 전력용 ESS와 데이터센터 백업을 위한 무정전전원공급장치(UPS) 수요도 크게 늘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LG에너지솔루션도 마음이 급하다. 미국 공장의 전기차용 생산라인을 ESS 라인으로 전환하는 방안까지 검토할 정도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짓고 있는 연산 17GWh 규모 ESS 배터리 공장 완공을 기다리다 뒤처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ESS 강화 전략은 최근 성과로도 이어졌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한화큐셀과 4.8GWh 규모 ESS 공급 계약을 맺었다. 금액으로 따지면 약 1조원 정도로 알려졌다.
SK온 역시 ESS 사업 강화에 고심이다. 관련 업계에선 SK온의 미국 내 ESS LFP 공장 설립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차전지업계 관계자는 “최근 SK그룹 안팎의 문제가 사업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미래를 고려하면 ESS용 LFP 배터리 공장 설립은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데이터센터 특명 ‘열 식혀라’
예상 못한 ‘기회’ 잡은 정유업계
AI 데이터센터의 또 다른 문제는 열이다. 대량의 정보를 보관하고 처리하는 만큼 높은 온도로 발열한다. 이에 ‘냉각’이 중요하다. 통상 데이터센터 전력량의 절반 정도가 냉각에 쓰인다고 알려졌다. 냉각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공기 순환을 활용하는 ‘공랭식(air cooling)’, 제품 주변에 물이 흐르는 관을 설치해서 열을 식히는 ‘수랭식(liquid cooling)’ 방법이다. 통상 수랭식이 공랭식보다 전력 효율이 높다. 문제는 AI 데이터센터가 처리하는 양이 늘어날수록 수랭식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다는 것. 이에 새롭게 각광받는 게 ‘액침식(immersion cooling)’이다.
액침식은 이제 막 상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액침식은 데이터센터 서버나 전자제품, 배터리 등을 전기가 통하지 않는 비전도성 기름(특수 냉각 플루이드)에 침전시켜 열을 식히는 구조다.
국내 기업들도 관련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특히 LG전자를 주목한다. 김동원 KB증권 애널리스트는 “향후 AI 데이터센터 냉각 시스템 대세는 수랭식, 액침 냉각 등을 혼용한 하이브리드 방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며 “데이터센터 전력 효율과 발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냉각 시스템 분야에서 LG전자가 다양한 솔루션을 확보하고 있어 기업간거래(B2B) 냉난방공조시스템 고성장이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특히 차세대 기술로 부각되는 액침 냉각의 경우 LG전자가 관련 기술을 이미 확보하고 있어 액침 냉각 용액을 출시한 GS칼텍스와 수직계열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SK엔무브와 GS칼텍스 등 정유업계도 액침식에 꽂혔다. 이들은 액침식에 쓰일 기름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윤활유 자회사 SK엔무브는 2022년 일찌감치 데이터센터 액침 냉각 시스템 전문 기업 미국 GRC에 2500만달러(약 340억원)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GS칼텍스도 지난해 액침 냉각 전용 윤활유 ‘킥스 이머전 플루이드 S’를 내놓으면서 시장에 발을 들였다. 에쓰오일도 액침 냉각유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에쓰오일은 지난 4월 열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개별 데이터센터에 적합한 다양한 시제품 라인업을 구비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연내 실증평가를 진행, 에너지 절감 성능과 안정화 등을 검증할 계획이다.
[최창원 기자 choi.changwon@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3호 (2024.06.12~2024.06.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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