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사업에 나선 친일 의원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청사 |
ⓒ 서울역사박물관 |
2018년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7권에 실린 류상진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의 논문 '1930년대 총독부의 석유정책과 조선 내 석유시장의 변화'에 따르면, 1929년에서 1934년에 조선에 들어온 휘발유는 2만 2376킬로리터(kl)에서 5만 8946kl로, 중유는 2만 8595kl에서 6만 6032kl로, 기계유는 8668kl에서 1만 5002kl로 배증했다.
총독부는 석유산업에 개입해 석유 수급을 안정화시키고 대륙침략을 원활히 해야 했다. 이것이 절실했던 것은 스탠다드·라이징선·텍사스 같은 영미권 기업들이 식민지 한국에서 거의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런 상태를 불안해했다. 시장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으리라는 우려에서였다. 위 논문은 일제가 석유 시장을 빼앗고자 제정한 석유업법의 내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유업과 수입업은 총독의 허가를 받을 것, 이전까지 업체 간 협의에 의해 정해지고 있던 조선 내에서의 판매량 할당과 가격을 총독부가 지정하도록 할 것, 일본 본국과 마찬가지로 6개월분의 저유 의무를 이행할 것, 공급·생산 설비 등에 대해 총독이 긴급명령권을 갖도록 규정하였다."
총독부가 판매량과 가격을 정하고 긴급명령권을 갖는 방법으로 시장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각 기업이 6개월 치 석유를 비축해 전시의 필요에 부응하게 했다. 이 법은 1934년부터 시행됐다.
그에 더해, 일제는 1935년에 조선석유주식회사라는 국책 기업을 설립해 시장에 투입했다. 경제착취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과 김연수·박흥식 같은 친일 기업인들이 주요 주주로 참여했다. 식민지 시장을 장악하라는 특명을 이런 공룡 기업에 내렸던 것이다.
조선석유주식회사는 얼마 안 있어 한국 시장을 상당부분 삼켰다. 이로 인해 서양 기업들의 독점적 지위가 사라지고 말았다. 위 논문에 따르면, 1938년에 서양 기업들의 휘발유 시장점유율은 37%로, 중유는 40%로, 기계유 판매량은 5%로 떨어졌다. 전시체제를 명분으로 한 석유시장 재편이 일본 국가권력 및 재벌과 친일 기업을 살찌우는 효과도 낳았던 것이다.
▲ 1940년에 발간된 <진주대관>에 나오는 최지환. |
ⓒ 진주대관 |
석유 수요가 높아지고 일제의 시장 개입이 강화되는 이런 상황에 뛰어든 친일파가 중추원 참의 최지환(崔志煥)이다. 1936년에 부지사급인 충남참여관을 끝으로 행정직을 퇴직하고 총독 자문기관에 들어간 인물이다.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인 후지산(富士山)과 대표적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를 합성한 후지야마 다카모리(富士山隆盛)가 그의 창씨명이다.
오늘날의 국회의원 비슷한 위상을 가진 중추원 참의 최지환은 석유 영업을 자신의 사업 종목에 추가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지환 편은 "1938년 4월 주식회사 협성상회 취체역을 지냈다"고 말한다.
▲ <진주대관>에 소개된 협성상회. 최지환의 창씨명 끌 글자가 성(盛)이 아닌 함(咸)으로 오기돼 있다. |
ⓒ 진주대관 |
<진주대관>에 따르면, 최지환이 취급한 석유 중 하나는 솔표 석유 혹은 송표(松票) 석유다. 갑신정변이 난 1884년에 미국 스탠다드의 제품이 수입됐다. 조선에 최초로 도입된 이 제품이 우리말로 솔표 석유였다. 값이 비싼 대신, 악취와 매연이 없었다. 서양제 석유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떨어지는 시기에 최지환이 이런 고급 서양 제품을 취급했던 것이다.
일제가 한국 석유산업에 관심을 기울이던 1930년대에는 박정희·윤석열 두 대통령처럼 '석유 나왔다'고 외치는 이들이 많았다. 1935년 2월 4일 자 <조선일보> '분출! 석유 원유'는 "전에는 말도 업든 석유광 출원이 이십여 건이 나 잇서 과연 조선에도 석유가 나는가 안 나는가 비상히 주목되든 바"라며 경기도 용인군에서 석유가 나왔다고 보도했다.
"이번에는 우물 엽헤서 원유가 쏘다지는 것을 발견하야 광업왕국의 면목을 한층 빗나게 한 소식이엇다. 경긔도 룡인군 외사면 죽산과 백암 간의 도로 왼편에 잇는 논 엽헤 우물 하나가 사오년 전부터 잇섯는데, 이 우물은 이상히도 물이 비상히 풍부하야 항상 물이 넘치므로 우물 엽헤 깁히가 넉 자나 되는 개천을 파서 그로부터 흐르는 물을 논에 배수하여 왓섯는데 최근에 와서 그 물에는 기름이 뜰 뿐 아니라 석유 냄새가 나서 음료에는 사용치 못하게끔 되엇슴으로 하도 이상하야 그 부근을 사오척 파본즉 흐른 물이 쏘다저 나옴으로 이것을 걸러본 결과 훌늉한 원유를 엇게 되엇다 한다. 그리하야 이것이 석유라는 것을 알게 되자 황해도 김영태 씨가 곳 총독부 광산과에 광구 출원을 하엿다 한다."
석유 수요가 높아지고 총독부가 이 산업에 개입하던 때였다. 그런 시기에 '우리도 산유국이 될 수 있다'는 헛소문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이런 속에서 중추원 참의 최지환이 협성상회를 운영하면서 석유 제품도 취급했던 것이다.
친일 활동을 기반으로 협성상회 운영
한양에서 임오군란이 벌어진 1882년에 경상도 산청에서 출생한 최지환은 22세 때인 1904년에 산청군 소송담당 서기가 됐다. 1906년에는 진주경무서 순검으로 변신했고, 이듬해에는 군대 해산에서 두각을 보였다. <친일인명사전>은 "1907년 군대 해산에 저항하는 진주진위대를 해산시키는 데 앞장섰다"고 설명한다.
군청 서기와 순검으로 시작한 그는 얼마 안 가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1912년에 한국병합기념장을, 1915년에 요시히토(다이쇼)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1년 충북경찰부 보안과장을 끝으로 경찰복을 벗은 뒤로는 음성군수를 시작으로 행정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에 대한 일제의 주목은 계속됐다. 1926년·1931년에 서보장을 훈장으로 주고, 1928년에 히로히토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대례기념장을 주었다. 일제가 준 표창은 이 외에도 여럿이다. 이런 이력이 발판이 돼 충남참여관을 그만둔 1936년에 54세 나이로 중추원 참의가 됐던 것이다. 그런 뒤에 협성상회를 차린 그는 뒤이어 기생 조합인 진주예기권번의 취체역사장도 됐다.
그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 당시부터 일제의 녹봉을 받았다. 중추원 참의로 부역한 1936년~1942년에는 연봉 1200원을 받았다. 서울의 직공 노동자들이 월급 10원도 받기 힘든 시절에 한 달 100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봉급을 받으면서 그가 적극 추진한 것 중 하나가 '국어 상용'이었다. 그는 국어 상용의 필요성을 외치는 친일 의원이었다. 이런 친일 활동을 기반으로 협성상회를 운영하며 석유도 팔았으니, 이런 데서 생긴 수입 역시 친일재산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제 말기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등이 되어 징병제를 열렬히 옹호했던 최지환은 해방 4년 뒤인 1949년 친일 청산기구인 국회 반민특위 경남조사부에 체포됐다. 1959년 5월 14일, 77세를 일기로 그의 친일 인생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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