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보이려 글 쓰다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김승재 2024. 6. 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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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 잃고 알게 된 세상] 어두운 내 마음을 밝혀주는 작은 등불, 나만의 글쓰기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김승재 기자]

한때는 글재주가 좋다는 건 빼어난 문장력을 갖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도 뭔가 써보겠다고 나서고 보니 글재주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다. 글감을 잘 선택하는 것도 재주고, 그저 그런 글감을 요리조리 다듬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재주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밋밋한 이야기를 정말 흥미진진하게 바꾸어 놓는 것도 재주였다.

이렇게 많은 글재주가 모이고 모여서 작품 하나를 만드는 거였다.

그럼, 글재주가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는 걸까? 무슨 그런 소릴...말재주가 없으면 말도 못 하나? 글을 쓰는 건 자유고 권리다. 그리고 일단 글을 써 봐야 글재주가 있는지 없는지도 아는 거다.

그런데 나는 이런 깨달음을 얻고도 두 번씩이나 엉뚱하게 글재주 타령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나 자신을 타박했었다.

볼 수 있었을 때 나는 글쓰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책도 그다지 많이 읽지 않았다. 그런데 볼 수 없게 되면서 오히려 책을 더 많이 들었다. 한때는 일 년에 200권이 넘는 책을 듣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도 써 보고, 누구에게도 부치지 않을 편지도 써 보고, 맘대로 인물들을 창조해서 우주에도 보내고, 사랑도 하게 하고, 고민과 고난 속을 헤쳐 나오게도 하고, 싸움도 시켰다.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어 그냥 계속 쓰고 또 썼다.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내 마음이 열렸다. 온통 어둠만이 가득하던 눈앞에 환하게 빛이 번져갔다. 그 누구도 말해 줄 수 없고,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마음속 나를 만날 수도 있었다.

첫번째 글재주 신세 타령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글쓰기가 마음의 등불을 밝힌다
ⓒ 김미래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욕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나만의 글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줄 글을 쓰기 시작했고, 첫 번째 글재주 신세 타령이 시작됐다.

"난 재주가 없나 봐. 한 줄도 못 쓰겠어."

기분 좋게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가 한동안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더니 답했다.

"숙제하냐? 그냥 네 글을 쓰면 되잖아. 누구한테 검사받는 것도 아니고."

그날 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가 좋아서 쓰는 것이지, 남 좋으라고 쓰는 게 아닌데 헛소리면 어떻고 비문(非文)이면 어떨까.

다음날, 나는 나만의 단편 소설을 한 편 썼다. 상쾌했고 뿌듯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만 재밌고 나만 괜찮았지만, 자신감이 생겼다. 글은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학교에 다니고 강의를 듣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써야 한다. 그렇게 쓰고 또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숨겨진 내 글재주가 길고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날 수도 있는 거고, 신기하게 없던 글재주가 도깨비 방망이에라도 맞은 듯 뚝딱 생길 수도 있는 거니까.

두번째 글재주 신세타령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이번에는 뜻밖에 들려오는 칭찬에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욕심이 났다. 출품이란 낯선 단어에도 호감이 생겼다. 두 번째 글재주 신세 타령의 시작이었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아니고, 손해 볼 것도 없는데 못 할 것도 없단 생각에 과감히 공모전에 응모했다.

하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재밌던 글쓰기가 괴로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나를 향한 관심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착각과 함께 한없는 고독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 네 번 공모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답을 받지 못했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수긍했고, 웃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마음이 상했다. 당선작도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아, 아쉽네. 또 내 봐요. 이제 겨우 시작인데요 뭐."

약간의 미소까지 머금은 아내의 말은 위로로도 격려로도 들리지 않았다.

"시기와 질투의 시간이구나. 계속 써, 그러면 이 시간도 지나가."

문학을 전공한 선배의 이 말이 왠지 조롱처럼 들렸다.

"겨우 네 번? 열 번은 해 봐야 하는 거 아냐? 그냥 계속 쓰면 되겠네."

술 한 잔과 함께 던진 친구의 이 한마디 때문인지 술맛이 그렇게 쓸 수가 없었다.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데 아내도 친구들도 별것 아니라는 듯 웃고 있었다. 졸지에 그렇게 따뜻했던 사람들이 너무도 싸늘하게 변해 버린 느낌이었다.

컴퓨터를 켜고 '글동네 내동네'라는 폴더를 열었다. 그동안 내가 쓴 글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파일 제목을 하나씩 듣고 있자니 불현듯 화가 났다. 글재주도 없는데 괜히 설친 내가 한심했다.

일기를 하나 열어 들어봤다. 조잡하고 산만하고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썼던 몇십 개의 일기 파일을 모두 지워버렸다. 내가 내게 쓴 편지도 지우고, 아이디어랍시고 모아둔 짧은 줄거리들도 지워 버렸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지워가다가 내가 처음으로 쓴 장편 소설 폴더에 닿았다. 53장으로 구성된, 글자 수만도 40만 자가 넘는 장편 소설이었다. 이 글을 쓸 때가 생각났다.

2017년 12월 어느 날,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나는 소설에 나오는 '시드니 카턴'처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주인공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한 달 넘도록 밤을 새우고, 끼니를 거르면서 쓰고 또 썼다. 너무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깨가 쑤시고, 팔목이 아프고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좋았다.

시력을 잃은 나는 현실이나 내가 만든 소설 속 세상이나 모두 마음의 눈을 통해 봐야 한다. 크게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나는 글을 쓰면서 과거든 미래든 어느 때라도 시간 여행을 갈 수 있었고, 어느 곳이라도, 누구하고도 맘껏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때는 꿈에도 내 소설 속 장면과 등장인물들이 자주 나왔다.

그때 이런 꿈을 꿨다.

일제 강점기, 색욕과 탐욕에 불타는 조선인 순사를 피해 여자 주인공 경화가 도망가야 했다. 흰 무명 저고리에 검정 치마, 가슴에는 보따리를 안고서 평양 빈민촌 근처를 달려가는 경화가 바로 내 눈앞에서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구름을 벗어나 환하게 빛나는 달빛으로 내가 그려낸 곱고도 청순한 경화의 얼굴이 너무도 도드라져 보였다.

잠에서 깨자마자 나는 실수를 깨달았다. 서둘러 꿈속 장면이 써진 곳을 찾았다. 밤길인 데다가 빈민촌을 지나가는 경화의 얼굴과 옷이 너무 눈에 띄었다. 나는 경화의 얼굴에 검댕을 칠하고, 흰 무명 저고리에도 얼룩을 남겼다.

등장인물이 꿈속에 나와서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그 소설에는 주인공 경화를 곤경에 빠뜨리는 조선인 밀정 부부가 나온다. 별로 큰 비중은 없었는데 나는 왠지 밀정의 부인에게 '봉순'이란 이름도 지어 주고 약간의 서러운 과거까지 만들어 줬다. 그런데 그 봉순이가 꿈에 나왔다.

봉순이는 먹고 살기도 힘들었고 남편까지 잘못 만나 서러운데 밀정으로 낙인찍고 그렇게 허무하게 죽여버리냐고 정말 펑펑 울면서 내게 따지고 있었다. 꿈같지 않았다. 너무도 생생했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봉순이가 등장하는 부분을 완전히 새로 썼다. 그리고 봉순이가 원한대로 자기와 남편이 진 죄를 뉘우치며 경화를 대신해서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했다.

봉순이가 하늘을 우러르며 죽던 날,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내가 정신병원 입원을 고민할 정도로 펑펑 울었다. 그날 밤, 봉순이가 꿈에 나왔다. 내가 다시 그려낸 그녀의 마지막 모습처럼 일본군을 쓰러뜨린 총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만든 나만의 세상, 어둔 내 맘을 환히 밝히는 작은 등불.
ⓒ 김미래/달리
  
밤새 내 소설을 다시 듣는 동안, 나는 글을 쓰면서 내 눈앞의 어둠을 헤쳐 나가던 그때로 돌아갔다. 내게 글쓰기는 즐거움이었고, 기쁨이었고 놀이였다. 나는 깨어 있을 때도, 꿈을 꿀 때도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나를 만나고, 내가 만든 인물들과 떠들고 함께 달리고 싸우고 울었다.

글재주는 문제도 아니었다. 아무도 내게 글을 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쓰기 싫으면 관두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내가 계속 쓰고 또 썼던 것은 딱 한 가지 이유, 바로 내가 좋아서였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어느 순간 남에게 보여주려고만 글을 쓰면서 괴로워하고 화를 내고 글재주 신세 타령을 했다. 내가 만든 세상과 인물들도 그냥 컴퓨터 파일 안에만 머무를 뿐 더 이상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글을 쓰면서 느꼈던 보람과 재미가 살아났다. 덤으로 '사는 이야기' 연재라는 기회도 얻었다. 생각해 보면 출품이 준 쓰라림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날 깨닫게도 했고, 나를 돌아볼 많은 시간도 마련해 줬다.

여전히 글감은 떠오르지 않고, 문장도 마음에 안 들고,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 갈지 어렵고 힘들지만, 이건 성장통에 불과하다는 걸 믿는다. 이러다 보면 없는 글재주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고, 쓰고 또 써서 다시 출품하고 뜻밖의 답을 들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쓰고 싶다.

아, 그런데 그때 지운 파일들을 깜빡하고 휴지통을 비워버렸다. 속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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