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임기구, 담배, 커피... 자판기가 불안했던 사람들, 왜?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기자]
▲ 커피 자판기 |
ⓒ 연합뉴스 |
이즈음 세계 석유공급의 15%를 차지하고 있던 산유국 이란에서 반정부 데모가 시작되었고, 이어진 이슬람 혁명으로 제2차 오일쇼크가 시작되었다. 6월 12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진도 5.0의 지진이 발생하여 전 국민이 일시적이나마 공포에 떨었다. 때마침 터진 지진과 함께 고물가와 정치 불안으로 찌들어 있던 민심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적인 커피원두 가격 상승의 여파로 이해에 국내 커피 출고가의 대폭 인상이 허용되었다. 1978년 5월 정부는 레귤러커피의 가격을 49%, 인스턴트커피 가격을 51%, 다방 커피 한잔 가격은 100원에서 130원으로 인상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1974년에 50원 하던 다방 커피 한 잔 가격이 3년 만에 160% 인상된 것이다. 살인적인 물가 상승을 체감할 수 있는 지표였다. 8월 22일에는 브라질에서 최근 발생한 이상 냉해로 커피 작물의 1/3 이상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져 커피 가격의 추가 폭등에 대한 우려가 다시 제기되었다.
물가가 오르고 민심은 들끓었다
1976년 말 기준 전국 다방 수는 1만 4081곳이었고, 서울에 3139개가 모여 있었다. 시급 이상 도시에 70% 정도, 나머지 지역에 30% 정도가 분포되어 있었고, 지방 면 소재지 정도면 다방이 한두 곳은 들어서 있었다. 커피 원두 수입이 1973년에 2278톤, 비용으로 264만 달러를 지출하였던 것이 1977년에는 비슷한 양을 수입했음에도 가격 상승으로 1127만 달러를 지출함으로써 최초로 원두 수입에 1천만 달러를 사용한 해로 기록되었다.
커피 원두 수입이 자유화된 것이 1978년 5월 1일이었다. 외화 절약을 위해 대용 커피로 치커리 뿌리 소비가 권장된 것도 당시였다. 커피뿐 아니라 모든 물가가 오르고 민심은 들끓었다. 자고 나면 시내 모 다방에서 인질극이 벌어졌다는 소식, 다방 화재로 종업원 여러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흑백 TV를 통해 전해졌다.
이해 12월 12일 있었던 국회의원 총선거에 반영된 것이 이런 흔들리는 시대의 악화된 민심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에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이 참패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기반이 흔들렸다. 이런 위기 속에서 박정희는 12월 27일 생애 마지막으로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같은 날 수감 중이던 그의 정치적 라이벌 김대중은 특별 사면에 따른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커피를 마시며 국내외 기자들을 만났다.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된 197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는 멀어지는 민심을 잡고자 여러 시도를 했다. 1976년에 발표한 포항 영일만 유전 발견 소식도 그중 하나였다. 일시적인 분위기 전환은 이루었지만 효과가 길지는 않았다. 1978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임시수도 건설 계획을 발표하였다. 물론 즉흥적인 발표는 아니었다. 2년 이상 연구해 온 이른바 '백지계획'의 결과를 발표한 것이었다. 이전 대상지를 확정하지 않은 상태, 즉 백지상태에서 행정수도를 남쪽에 건설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이 발표와 함께 후보지로 예상되던 충청남도 일원에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불었다. 수도 이전 계획을 연구 중이던 당시 한 비공식 회의에서 박정희가 하였다고 전해진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교육이 문제의 출발점이었고, 따라서 해결의 열쇠도 교육에서 찾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많은 대학생이 한 지역에 몰려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하지 않는가. 대학만 바라보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어찌 막을 건가. 나는 2∼3년 전부터 임시 행정수도 건설을 생각해왔네. 6·25 전쟁이 끝난 후에 중부 지역으로 수도를 옮겼어야 했어. 그러나 서울에 계속 머무른 탓에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야. 임시 행정수도 건설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나." (신동아 2004년 4월호, 김병린 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구술)
그러나 카터 행정부의 갑작스러운 미군철수 계획 발표, 이에 따른 국방비 증액 필요성 증대 등으로 인해 이 계획은 보류되었고, 이듬해 박정희의 몰락과 함께 이 계획은 묻혀 버렸다.
▲ 각종 음료 자동판매기(1982) |
ⓒ 연합뉴스 |
거리에 커피 자동판매기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8년 3월 22일이었다. 종각, 시청, 서울역 세 곳에 설치되었고, 커피 한 잔 가격은 100원이었다. 롯데산업과 화신전기가 일본에서 수입한 자판기를 설치한 것이다. 물론 자동판매기로 첫선을 보인 것이 커피는 아니었다. 1970년대 초반 극장과 백화점 등에 등장한 피임기구 자동판매기였다. 인구 증가 억제 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이어서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한 것이다.
거스름돈 반환과 주화 감별 기능을 갖춘 자동판매기가 국내 처음으로 삼성전자에 의해 개발되어 판매에 들어간 것이 이해 6월이었다. 첫 제품으로 담배용 자동판매기 2백 대를 생산하여 동방빌딩에서 사용하였다. 이어서 8월에는 커피 자동판매기도 생산 판매를 시작하였다. 삼성전자에 이어 금성사, 동양정밀 등도 일본의 기술 협조를 받아 9월에 자동판매기 생산을 시작하였고, 롯데산업과 화신전기, 대한전선도 자판기 생산 사업을 추진하였다.
여름이 되자 자동판매기의 냉커피값이 50%씩 기습 인상되었다. 롯데산업의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되는 냉커피, 냉밀크커피, 냉블랙커피 등 얼음이 들어간 커피가 100원에서 150원으로 인상됐다.
롯데산업은 서울 시내 지하철 대합실, 회사 등에 4백 대의 자판기를 설치하여 대당 60잔, 하루 평균 240만 원 정도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커피 자동판매기가 이해 9월에 설치되는 등 그야말로 우후죽순 등장하는 것이 커피자동판매기였다.
커피자동판매기 산업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화신전기는 자사 생산 제품 400대를 9월 말까지 일본의 벤다재팬사에 공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3년간 공급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다. 1978년 말 전국에 설치된 커피 자동판매기 대수가 다방 개수를 넘어섰다. 심지어 초등학교 매점에도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자동판매기 열풍 속에 우려의 목소리가 등장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용어 이른바 '오토메이션 시대'에 대한 불안이었다. 인간이 편리하고자 만든 기계가 정도를 넘어 인정마저 차단하는 괴물로 등장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다. 7월 31일 자 '경향신문'은 동전 한 닢 넣으면 냉음료, 온음료는 물론 치즈와 양주까지 쏟아져 나오는 자동판매기의 보편화 현상이 어디까지 전개될지 모를 일이라는 우려를 전했다.
2000년대쯤엔 외로운 홀아비가 길에서 주화를 넣으면 미모의 여성 복제인간이 불쑥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라고 하였다. 우려했던 그 2천년대가 시작된 지 20년 이상 지났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비슷한 맥락에서 AI에 의한 인간 지배가 반현실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흥미로 이용하던 자동판매기에 대한 기피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커피 자동판매기가 등장한 지 1년 정도 지난 1978년 말부터였다. 오랫동안 동전을 삼키는 공중전화를 경험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동전을 삼키는 자동판매기를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피 자동판매기의 잦은 고장이 시민들의 불만을 만들었다. 몇 차례 판매기에 동전을 넣었다가 동전만 잃은 뒤 다시는 이용할 생각이 없어졌다는 시민들의 제보가 이어졌다. 고장 시에 신고해 달라는 안내서가 판매기마다 붙어 있었지만 1백 원을 받자고 다시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거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었다.
커피의 역사에서 편리함을 위해 맛을 양보하였던 대표적인 나라가 20세기 중반 미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70년대에 등장한 인스턴트커피, 다방, 커피자판기의 열풍으로 커피는 고유한 맛이나 향으로 즐기는 고급 음료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마시는 저급한 음료로 변하여갔다. 그동안 정부의 커피소비 억제 정책에 부응해 캔커피 생산에 참여하지 않았던 동서식품이 캔커피 시장에 진출한 것도 이해였다.
(커피인문학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1978년 기사 일체.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길상(2023).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역사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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