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전부터 있었는데, 왜 몰랐지?…'힙플' 떠오른 이 박물관 [비크닉]
■ b.플레이스
“거기 가봤어?” 요즘 공간은 브랜드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장소를 넘어 브랜드를 설명하고, 태도와 세계관을 녹여내니까요. 온라인 홍수 시대에 직접 보고 듣고, 만지며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은 좋은 마케팅 도구가 되기도 하죠. 비크닉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합니다. 화제의 공간을 만든 기획의 디테일을 들여다봅니다.
「
」
‘박물관은 고루하다?’
최근 MZ세대 사이에서는 안 통하는 편견입니다. 오히려 박물관이 새로운 여가 장소로 떠오르고 있죠. 대표적인 사례는 국립중앙박물관. ‘달멍(달항아리를 보며 멍 때리기)’하거나 사유의 방의 불상 앞에서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젊은 관람객들이 한둘 아닙니다. 이제는 전시만 아니라 박물관 굿즈까지 인기를 얻고 있죠.
박물관의 재발견은 서울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충남 아산시에 위치한 온양민속박물관도 그중 한 곳입니다. 공예·디자인 전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더니 지금은 일부러 이곳을 찾는 관람객이 부쩍 늘었습니다. 1978년, 무려 46년 전부터 있었던 이곳이 이제서야 힙한 공간으로 주목받는 이유가 뭘까요.
온양에 사는 사람도, 지역 학예사들도 “있는 줄 몰랐다”던 온양민속박물관이지만 사실 개관 초기에는 한 해 70만 명의 학생들이 찾을 만큼 수학여행 필수 코스였어요. 시간이 흘러 기억 속에 잊히던 박물관에 변화가 생긴 건 김은경 관장 취임부터입니다. 낡은 공간은 고치고 박물관 매뉴얼을 새롭게 만들었어요. 무엇보다 젊은 공예가와의 접점을 늘리고 전통을 오늘날 감각으로 소개하는 전시를 기획했습니다. 그 결과 개관 40주년 기념전 〈일상의 유산X유산의 일상〉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았죠. 오늘 비크닉에서는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오는 사람은 없다”는 오래된 박물관의 터닝 포인트를 짚어 봅니다.
①전국팔도에서 수집한 ‘한국인의 삶’
온양민속박물관은 아동 서적 출판사를 운영하던 구정(龜亭) 김원대(1921~2000) 선생이 1978년 사재를 털어 건립한 우리나라 최초 사립 민속박물관입니다. 당시 새마을 운동 영향으로 사회가 빠르게 변하는 것을 보고, 옛 문화를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요.
흔히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 오래전 국보나 보물처럼 귀한 걸 떠올리지만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전시품은 다릅니다. 불과 몇십 년 전 이 땅에서 쓰였던 밥그릇·소반·쟁기 같은 생활용품,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희귀품입니다. 당시 학예사들이 지역마다 특징을 담으면서도,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소장품을 수집하러 전국팔도를 다녔어요. 강원도 산골에서 썼던 나무로 만든 김칫독, 제주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요람으로 썼던 ‘아기 구덕’ 같은 생활 유산들이 속속 박물관에 자리합니다.
본관의 전시 테마를 보면 이런 박물관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한국인의 삶’, ‘한국인의 일터’, ‘한국문화와 제도’로 구성돼 있고, 전시실마다 선조들의 삶과 생활방식을 소개하고 있어요. 전체 소장품은 약 2만여점으로 이 중 2000여 점을 공개하고 있고, 이 중에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유물도 있답니다. 설립 취지에 따라 전시 구성은 크게 바꾸지 않는데, 대신 매년 기획전시를 통해 시대상을 반영한 기획과 관람객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입니다.
②어디에도 없다, 전통 정원의 재발견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으로 삼국시대 백제의 한 궁궐을 보고 역사가 김부식이 남긴 말입니다. 온양민속박물관 장인기 학예실장은 이런 ‘검박함’이야말로 온양민속박물관이 지닌 독창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박물관은 총 8만2644m² 규모(2만 5000평)로 본관·구정아트센터·카페온양·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입구부터 남다릅니다. 기와문인 ‘설화문(雪華門)’을 통해 들어서는데 박물관이 아니라 마치 궁에 온 기분이 들게 하지요. 굽어진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머리 위로 박물관 본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박물관 입구부터 본관까지 이어지는 ‘장면의 시퀀스(sequence)’는 건축가의 치밀한 설계랍니다.
본관을 설계한 김석철 건축가는 우리나라 현대 건축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 예술의전당,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건축물과 외부 환경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도록 했는데요. 입구에서 본관이 보이지만 태극 문양으로 휘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길 따라 정원을 감상하다 보면 다시 서서히 건물이 드러나게 설계했죠. 전통 사찰에 가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한 계단씩 오를 때마다 절의 모습이 보이는 ‘시점의 미학’이죠. 본관의 규모는 웅장하지만, 벽돌로 쌓은 외관 덕분인지 차분하고 검소한 인상을 줍니다. 긴 처마와 누마루의 형상은 한국 전통 건축물에서, 벽돌 쌓는 방식과 색은 무령왕릉에서 모티프를 얻었다고 하네요.
신록이 짙게 스민 정원, 울창한 아름드리나무와 연꽃이 고개를 내민 연못, 강원도에서 직접 옮겨온 너와집. 박물관의 백미 중 하나는 6만4,800㎡ (약 2만평) 규모의 정원입니다. 지금은 울창한 숲이 되었지만 설립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다고 하는데요. 건축 당시 조경가의 이름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긴 세월 동안 박물관 직원들이 한마음이 되어 가꿔온 정성이 정원에 그대로 드러나 있죠. 리얼인문학 박소영 대표는 “멋진 정원을 만들려고 맥락에도 맞지 않는 외국 아티스트의 조각품을 들이거나 억지로 조경을 만들지 않은 점이 온양민속박물관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반세기 가까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수목들, 전통 석상과 고인돌이 오히려 이곳만의 특별함을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③거북선 형상화…건축가 이타미준의 첫 작품
온양민속박물관은 건축 투어 장소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1982년 설립한 구정아트센터(설립 당시 이름은 온양미술관)는 재일 교포 건축가 이타미준(유동룡)의 국내 첫 건축물입니다. 2005년 프랑스 슈발리에상, 2010년 일본에서 가장 권위적인 건축상인 무라노 도고상을 받으며 세계가 주목한 건축가이자 국내선 제주 포도호텔, 수풍석미술관, 방주교회로 유명하죠. 김홍식 초대 관장은 "80년대 당시 선생님은 이미 일본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던 건축가였습니다.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문화를 궁금해했던 선생님이라면 분명히 우리나라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합니다. 이타미준은 건축에 앞서 아산 지역의 향토와 지역성을 먼저 연구했습니다. 돌이 많은 온양의 특징을 살려 돌을 캐 돌담을 쌓고, 흙을 채취해 주민들과 함께 벽돌을 구웠다고 해요.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지역성을 담기 위해 건물은 전체적으로 거북선을 형상화했습니다. 멀리서 봐도 타원형의 지붕이 인상적이죠.
내부 구조는 충청도의 전통 건축 방식인 ‘ㅁ'자형 가옥 구조를 살려 지었습니다. 위를 올려다보면 나무로 짠 대들보와 콘크리트로 마감한 부분이 조화롭게 어우러집니다. 전시장 안에 들어갔을 때 드러나는 두 개의 큰 기둥은 이 공간의 트레이드 마크지요. “감동을 주는 건축물은 사람의 온기와 자연의 생명력을 밑바탕으로 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타미준의 건축철학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④허름한 창고를 개조한 카페온양
온양민속박물관을 ‘힙플레이스’로 만든 숨은 공신 중 하나는 카페온양입니다. 아무리 좋은 공간이라도 맛있는 커피 한 잔 없다면 허전하니까요. 수직으로 긴 모양의 카페 온양은 원래 박물관에서 창고로 쓰던 부속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2021년 공간디자이너 임태희 소장의 손길 아래 근사하게 변신에 성공했어요. 가로로 긴 건물의 특성상 너른 창을 내어 바깥의 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을 택한 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자연광 가득한 카페 어디서든 박물관 정원을 바라볼 수 있거든요. 테이블 형태가 기하학적인 모양인 것도 포인트입니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공간에서 비례감을 맞추기 위해 직접 디자인한 결과물이죠.
⑤여행하고 요가하고…전통에 머물지 않는 요즘 기획
최근 박물관의 인기 비결, 그 하이라이트는 체험입니다. 지난 5월 2024 박물관·미술관 주간을 맞아 ‘뮤지엄테라피: 침묵하는 감각’ 프로그램을 선보였어요. 온양민속박물관 산하 아산공예창작지원센터의 기획으로, 서울에서 출발해 온양민속박물관 관람, 인문학 강의, 공예 체험, 외암민속마을까지 투어하는 당일치기 여행 프로그램입니다. 점심에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마크로비오틱 요리연구가의 도시락을 받아 햇볕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즐거운 미식체험을 하고, 오후에는 전시에 참여한 이완 작가가 직접 나서 너와집에 설치한 작품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이종국 작가를 따라 칡덩굴을 가르고 엮어 작은 공예품을 만들어 보기도 했고요.
봄과 가을에 운영하는 공예 축제 프로그램인 ‘뮤지엄 테라피’는 박물관 역할의 확장 가능성을 잘 보여줍니다. 여행 투어 외에도 요가·명상·공연·워크숍·마켓·세미나 등 다양한 체험 행사를 진행하죠. 전시를 기획한 장인기 온양민속박물관 학예실장에게 박물관 공간과 전시 기획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 '민속'과 '박물관' 고정관념 깨는 오늘의 감각
장인기 온양민속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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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난해 ‘치유하는 감각’ 올해는 ‘침묵하는 감각’이라는 주제로 뮤지엄테라피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온양민속박물관의 ‘민속’과 ‘박물관’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대중들과 조금 더 가까이 소통하기 위해 마련된 프로그램입니다. 엄숙하거나 지루한 박물관이 아니라 즐겁게 즐기고 휴식하며 쉬어가는 박물관이 되었으면 해요.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며 살았던 선조들의 삶 속에는 앞으로 우리가 꿈꾸는 삶의 해답이 모두 담겨있어요. 지난해 공예로 치유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시작했고 올해는 무뎌진 감각들을 공예로 다시 소생시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Q. 투어 프로그램은 물론 공예 워크숍과 전시가 부쩍 늘어났는데 젊은 관람객의 달라진 반응도 느끼셨나요.
최근 세련된 MZ세대 방문객들이 박물관에 많이 방문하는데, 사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덕분에 전통이 점점 힙해지는 것 같아요. 이제는 젊은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온양민속박물관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Q. 온양민속박물관의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운영하고 계시는데 어떤 목표가 있나요.
민속을 우리의 소중한 일상 생활문화로 해석하고, 과거의 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디자인으로 다가가려고 해요. 그래서 대중들이 온양민속박물관을 좀 더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최대한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고 싶어요. 격식 없이 슬리퍼 신고 마실 나오는 곳이었으면 해요.
Q. 뮤지엄 테라피 투어 프로그램 외 가을에 준비 중인 전시나 기획도 소개해 주세요.
박물관 투어프로그램은 앞으로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또는 가족·기업·단체별 맞춤형 프로그램을 특화하는 방법을 모색 중이에요. 가을에는 온양민속박물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오래전부터 프랑스 남부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열리는 ‘부아부셰(Boisbuchet) 디자인 워크숍’처럼 매년 전통생활문화를 주제로 워크숍을 진행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이번 여름, 디자이너·공예가 30여 명과 함께 2박 3일 온양에서 머물면서 워크숍을 진행해요. 아마도 한국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워크숍을 통해 진행된 프로세스와 결과물은 10월 박물관 소장품과 함께 구정아트센터에서 전시됩니다.
」
온양민속박물관은 우리나라 민속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 힘쓰고 있어 공익적인 성격을 갖지만, 사립박물관이라 재정적 부침도 많이 겪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문 닫을 위기에도 처했었고요. 그런데도 뚝심 있게 운영해온 시간이 반세기를 향해 갑니다. 이제는 한국의 급격한 경제발전과 현대화의 반대 지점에서 태동한 박물관의 존재가 다시 주목받고 있고요. 무엇보다 트렌드의 최전선에 나서 사람들이 일부러 찾는 공간으로 떠오른 점이 박물관의 가장 큰 존재감이겠지요.
*참고:『일상의 유산』온양민속박물관, 2018
이소진 기자 lee.sojin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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