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힘 때문에... 비운의 세자들 따로 있었다

김종성 2024. 6. 1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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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N <세자가 사라졌다>

[김종성 기자]

조선시대 세자들 중에는 MBN 사극 <세자가 사라졌다>의 이건(수호 분)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시련을 겪은 세자들이 많다. 이런 비운의 세자들 중에 대표적으로 기억되는 이들이 의안군 이방석, 소현세자, 사도세자 등이다.

이성계의 제8왕자인 이방석은 이복형 이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 때 목숨을 잃었고,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는 아버지의 의심을 받던 중에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당했고, 영조의 제2왕자인 사도세자는 주로 기득권층과 갈등을 빚던 중에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혔다.

생전과 사후에 달라진 평가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이들이 비운의 세자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이 죽은 뒤에는 좋게 기억됐다는 점이다. 비참한 죽임을 당한 사람은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육체뿐 아니라 명예도 폄하되기 쉬운데, 이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살상의 가해자는 자신의 안위와 명예를 위해서라도 희생자의 명예를 더욱 짓밟기 마련이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기가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피해자들을 빨갱이로 몰며 이들의 명예를 거듭거듭 짓밟는다. 그래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사람은 세상에서 잊혀지기 쉽고, 설령 기억된다 해도 불명예스럽게 기억되기 쉽다.

그런데 이방석·사도세자와 소현세자는 정치적 공격을 받은 결과로 혹은 그런 압박을 받던 와중에 비참한 죽음을 당했지만, 죽은 뒤에는 좋게 기억됐다. 만 16세 때인 1398년에 살해당한 이방석은 태종 이방원 즉위 6년 뒤인 1406년에 소도군(昭悼君)으로 책봉되고 그 뒤 의안군으로 책봉됐다. 사후에 이방원 정권하에서 왕자의 지위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최대 요인은 이방석의 아버지인 이성계에게서 찾을 수 있다.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 뒤에 상왕과 태상왕의 위치에 있었다. 이방석의 명예회복을 간절히 희망하는 그가 군주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방석이 이방원 정권 하에서 왕자 대우를 받는 게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더해, 이성계 이후의 왕통이 이성계의 직계자손들로 채워진 점도 이방석의 명예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병자호란의 피해자인 소현세자는 1637년에 청나라로 끌려간 뒤 청나라 조정의 마음을 얻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의심을 받던 그는 인질 생활이 끝나 귀국한 지 2개월 뒤인 1645년 5월 21일(음력 4월 26일) 의문의 죽음과 함께 33년 생을 마쳤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부인 강씨와 세 아들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인조의 핍박을 받고 폄하됐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후계자 지위를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소현세자의 동생에게 넘겼다. 이는 인조가 소현세자의 사망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런데도 소현세자는 인조정권하에서 명예를 유지했다. 세자가 사망한 지 19일 뒤인 6월 9일에 소현(昭顯)이란 시호가 정해진 것이 그 증거다.

시호가 소현으로 결정된 이유와 관련해, 그날 기록된 음력으로 인조 23년 5월 16일자 <인조실록>은 밝은 덕으로 공을 세우고 좋은 행실을 세상에 알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 인조가 그런 뜻이 담긴 소현이란 시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이 아버지의 혈통이 그 뒤 계속 왕통을 이어갔다. 이는 소현세자가 육체적으로는 비참하게 죽었어도 명예상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기득권층을 비판해 아버지 영조의 국정 운영에 부담을 줬다. 그러다가 결국 아버지의 왕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렇지만 사후에 그는 아버지에 의해 곧바로 명예회복을 이뤘다.

사도세자 사망 당일인 1762년 7월 12일(음력 윤5.21), 영조는 그리움의 의미가 담긴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부여하면서 아들의 세자 지위를 인정했다. 아버지 영조는 아들의 육신은 죽였지만 명예는 죽이지는 않았다. 사도세자의 명예는 아버지 영조에 이어 아들 정조에 의해서도 지켜졌다.

그 후의 왕통은 아버지 영조의 혈통으로 채워졌다. 이는 사도세자에 대한 추모의 분위기가 이어지는 데 기여했다. 비참하게 죽은 세자의 사후 명예가 아버지의 정치적 위상과 일차적 관련성을 띤다는 점이 이런 데서도 나타난다.

세자임에도 목숨의 위협까지

<세자가 사라졌다>의 세자 이건은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의식불명이 된 상태에서 말도 못할 시련을 겪었다. 폐세자되어 도망다닌 것은 물론이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는 상황을 역전시켰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의식불명 상태로나마 왕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왕권이 형식상으로나마 이어진 것이 상황 역전의 발판이 됐다. 이방석·소현세자·사도세자가 명예회복에 성공한 것과 비슷한 이치가 드라마 속 세자 이건에게서도 확인된다.

이방석·소현세자·사도세자만큼이나 비운을 겪었지만 후세 사람들이 기억해주지 않는 세자들이 있다. 이들이 기억되지 않는 일차적 원인은 아버지의 권력 상실과 유관하다.

연산군의 세자였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세자가 된 이황은 여덟 살 나이로 유배를 당했다가 사약을 받았다. 광해군의 세자였다가 1623년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폐세자가 된 이질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귀양을 떠났다. 2개월 뒤 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들렸다. 이질의 부인인 폐세자빈 박씨는 나무 위에서 망을 보다가 남편이 붙잡힌 모습을 보고 놀라 떨어졌다. 이 부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도 비참하고 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잘 모른다. 이들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이들에 대한 추모 분위기를 이어줄 힘 있는 아버지가 없었고, 이들의 아버지의 직계 혈통에서 차기 군주들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뿐 아니라 이름마저 잊혀지기가 쉬웠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비운의 세자로 기억하는 이들은 힘 있는 아버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이다. 아버지가 바닥으로 추락한 상태에서 비운의 최후를 당한 세자들은 잘 기억되지 않는다. 이는 비운의 세자들에 대한 역사인식에서마저 승자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정한 잣대로 조선시대 세자들의 운명을 재조명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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