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권 액션 자존심' 견자단은 이 영화다
[양형석 기자]
프로복싱 5체급 챔피언에 빛나는 플로이드 메이웨더는 현역 시절 50전50승27KO라는 완전무결한 전적을 만들고 은퇴한 복싱 역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특히 메이웨더는 상대의 펀치를 회피하는 '숄더롤'이라는 기술을 앞세워 '안 맞는 복싱'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물론 상대와 치고 받는 난타전을 벌이는 화끈한 스타일을 좋아하는 복싱팬들은 12라운드가 끝나도 얼굴이 멀쩡한 메이웨더의 스타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배우 스티븐 시걸의 대표작이자 1990년대 초반 대표적인 해양액션영화 <언더시즈>에서도 시걸이 연기한 케이시 라이백은 좀처럼 상대에게 맞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분명 2시간 가까운 런닝타임 동안 상대와 엄청난 혈투를 벌인 거 같지만 사건을 해결한 후 라이백의 얼굴은 갓 샤워를 마친 사람처럼 깨끗하다. 시걸은 시리즈마다 엄청난 사투를 벌였음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와는 상반된 액션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 <엽문>은 영춘권의 일대종사였던 실존인물 고 엽문의 일대기를 그린 액션영화다. |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
중화권 액션 '최후의 보루'로 불리는 남자
1963년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난 견자단은 무술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중국무술을 배웠다. 11살 때 미국 보스턴으로 이민을 간 견자단은 청소년기에 비보잉에 관심을 가졌고 부모님은 견자단이 불량청소년이 될 것을 우려해 다시 중국으로 유학을 보내 베이징 스차하이체육학교에서 정식으로 무술을 배우게 됐다. 그리고 견자단은 1980년 이연걸이 주연을 맡은 <소림사>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배우활동을 시작했다.
견자단은 1980년대 초반 원화평 감독을 만나 본격적인 직업배우가 됐지만 1980~90년대는 성룡과 이연걸이라는 액션 스타들에 가려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그저 <황비홍2>와 <신용문객잔> 등에서 인상적인 액션연기를 선보이며 액션팬들로부터 '홍콩에는 성룡, 이연걸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진 액션배우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성룡과 이연걸의 활동이 주춤하게 된 2000년대 중반 이후 견자단의 전성기가 열렸다.
2002년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천하의 시작>에서 이연걸을 상대로 멋진 창술액션을 선보인 견자단은 2003년 <천기변>과 2005년 <살파랑>, 2007년 <도화선>을 통해 각종 시상식의 무술감독상을 휩쓸었다. 견자단은 2008년 영춘권의 대가 엽문의 일대기를 그린 <엽문>을 통해 일약 중화권 최고의 액션배우로 도약했다. <엽문>은 2019년까지 정사 4편과 외전 한 편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총 5편의 영화가 제작됐고 견자단은 그 중 4편에 출연했다.
2011년 <삼국지: 명장관우>에서 권우를 연기한 견자단은 2015년 <스타워즈>의 스핀오프 영화 <로그원:스타워즈 스토리>에서 최후의 사원을 지키는 수도자 치루트 임웨 역을 맡았다. 견자단은 평소 "그저 중국 진출만을 위한 캐릭터라면 배역을 맡지 않겠다"며 할리우드 진출에 대한 생각을 밝혀 왔는데 <로그원: 스타워즈 스토리> 역시 대본을 받아 신중하게 캐릭터를 파악한 후 출연을 결정했다.
2020년 <뮬란> 실사판에서 뮬란(유역비 분)의 상관 텅 용 장군을 연기한 견자단은 작년 1월 <천룡팔부: 교봉전>의 한국개봉에 앞두고 내한해 예능프로그램 <런닝맨>에 출연했다. 견자단은 작년 4월에 개봉한 <존윅4>에서 맹인암살자 케인 역을 맡아 뛰어난 액션연기를 선보였다. 당시 일부 액션 마니아들은 "견자단이 맹인 역할을 맡은 것은 다른 캐릭터들을 위한 일종의 '밸런스 패치'"라며 환갑의 나이에도 건재한 견자단의 액션연기를 극찬했다.
▲ 견자단은 <엽문>시리즈를 통해 21세기 중화권 최고의 액션배우로 떠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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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엽문>은 영춘권의 일대종사(한 시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고수)로 불리던 실존 무술가 고 엽문을 인본제국에 대항하는 의인으로 만들어 그의 삶과 투쟁을 담아낸 작품이다. <엽문>은 1970~80년대 아시아를 지배했던 홍콩 무술영화의 노하우를 담아낸 파워풀하고 테크니컬한 액션연출이 액션영화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족주의와 항일이라는 확실한 주제의식 역시 단순한 스토리의 약점을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중국과 홍콩 현지에서도 평생 '액션배우 외길인생'을 걸어온 견자단을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고 평가하진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엽문은 복합적인 캐릭터가 아닌 뛰어난 무술실력을 바탕으로 정의롭고 겸손한 성격을 가진 비교적 단순한 인물이기 때문에 견자단이 연기하기에 크게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중화권 최고의 배우 양조위가 엽문을 연기했던 2013년작 <일대종사>가 흥행성적은 더 좋지 못했다.
한 가지 재미 있는 사실은 <엽문>을 통해 관객들에게 영춘권의 강함과 매력을 알렸던 견자단이 정작 영춘권을 배웠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견자단은 <엽문> 촬영을 앞두고 약 6개월 동안 영춘권을 배웠는데 영화에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견자단은 지난 2010년 인터뷰를 통해 "무술영화에서는 권법의 이름보다 관객이 무술을 하고 있는 인물을 믿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자신의 철학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고 견자단이 엽문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견자단은 영춘권을 수련하는 기간 동안 엽문의 장남이자 또 한 명의 영춘권 고수인 엽준으로부터 직접 자세 교정을 받았다. 또한 평소 생활할 때도 엽문처럼 옷을 입고 차를 마시면서 엽문의 스타일을 습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캐릭터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견자단은 관객들로부터 대체불가한 '엽문대표배우'로 각인될 수 있었다.
물론 <엽문>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실제 엽문의 생애와 다르게 많은 부분이 각색됐다. 특히 엽문이 일본 치하에서 저택과 재산을 모두 빼앗긴 것은 사실이지만 엽문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을 피해 홍콩으로 도피한 이야기 등은 영화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액션영화의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들어갈 필요가 없긴 했다). 실존인물로서의 엽문은 2013년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일대종사>가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이 더 많다.
▲ 슝다이린이 연기한 엽문의 아내 장영성은 2016년 <엽문3: 최후의 대결>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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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엽문>은 견자단으로 시작해 견자단으로 끝나는 영화지만 1편에서는 견자단 못지 않게 2000년대 후반 중화권에서 높은 지명도를 자랑하는 배우가 출연했다. 바로 엽문의 오랜 친구 주청천을 연기했던 임달화였다. 주청천은 영화 초반 엽문에게 방직공장 동업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고 영화 중·후반엔 깡패 일당들에게 고초를 겪는다. 전투력(?)은 매우 약하지만 마지막엔 엽문 가족들이 홍콩으로 도피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크게 알려지지 않은 배우 슝다이린은 엽문의 아내 장영성 역을 맡았다. 엽문의 아내는 남부러울 것 없이 부유하게 살고 있지만 엽문이 가족들을 돌보기 보다는 언제나 영춘권 수련에만 열중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일본에게 재산을 다 빼앗긴 후 허드렛일을 해 먹을 것을 구해오는 남편을 보면서 남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2편에서 둘째를 낳은 장영성은 3편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2004년 주성치 감독의 <쿵푸허슬>에서 돼지촌의 짐꾼으로 살아가는 숨은 고수로 출연했던 석행우는 실제 소림사에서 10년간 수련을 쌓으며 무승자격을 받은 인물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예능프로그램 <대단한 도전>에 출연해 무술시범을 보인 적도 있다. <엽문>에서는 엽문의 절친한 동생 무치림 역을 맡았는데 일제 침략 이후 일본인 대좌와 대결을 벌이다 일방적으로 패했고 끝까지 항일의지를 보이다 발차기에 심장 부위를 맞고 사망했다.
일본인 아버지와 엘살바도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배우 이케우치 히로유키는 <엽문> 1편의 최종보스에 해당하는 미우라 대좌를 연기했다. 미우라는 점령지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가라데를 가르치면서 중국 무도가들과 대결한다. 미우라 대좌는 무치림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료사부(진지휘 분)에게도 일방적으로 승리하지만 하필이면 엽문을 만나 목인장(중국권법에서 쓰이는 훈련용 도구)처럼 두들겨 맞다가 처참하게 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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