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첫 승리로 자신감 얻은 조선 수군의 현장

오문수 2024. 6. 15. 10: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해전 현장 답사기] 이순신 가묘가 있었던 경남 남해 충렬사에 가다

이순신 장군 해전 현장 탐사 대원들이 15일간 항해를 마친 후 쓴 항해기입니다. 1차 항해는 5월 22일부터 5월 28일까지 동방항로, 2차 항해는 6월 3일부터 6월 11일까지 서방항로로 15일간입니다 <기자말>

[오문수 기자]

 이순신 장군 해전 현장 답사에 나선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는 남해 충렬사를 돌아보고 기념촬영했다.
ⓒ 오문수
남해대교 아래 바지선에 정박한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방문한 곳은 남해 충렬사다. 남해 충렬사는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350번지에 있으며 사적 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는 노량해전 당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다. 

노량해전(1598년 11월 19일) 당시 관음포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잠시 이락사에 안치되었다가 남해 충렬사에 이장 안치되었다. 3개월간 가묘에 안치됐던 장군의 유해는 완도 고금도를 거쳐 1599년 2월 11일 아산 현충사로 운구되어 안장됐다.

남해 충렬사는 노량해전 당시 순국한 이순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충렬사로 불린 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후 1633년 이 고을 사람 김여빈이 초가집으로 사당을 짓고 장군을 추모하자 당시 현령 이정권이 충민공비를 세웠다.
 
 남해 충렬사에 있는 충민공비 모습. 1633년 남해현령 이정권이 충민공비를 건립했으나 1643년 나라에서 '충무' 시호를 내리자 땅속에 묻혔다가 1973년에 정화작업 중 발견되어 충렬사에 안치되었다.
ⓒ 남해충렬사
   
 남해 충렬사에 있는 충무공비 모습. 1633년 충민공비로 건립되었으나 1643년 나라에서 '충무' 시호가 내려지자 1658년 충무공비로 재건했다
ⓒ 남해 충렬사
 

그러나 1643년에 나라로부터 충무공의 시호가 내려지고 1658년에 국가의 지원으로 사당다운 사당이 세워지자 충무공의 5대손인 이명상이 새로이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는 땅에 묻었다. 

또 1973년에 남해충렬사가 국가사적 233호로 지정되면서 주변 정화 작업을 하던 중 땅에 묻혀 있었던 비를 발견하여 충렬사에 안치시켰다. 현재 충민공비는 충렬사 사당 왼쪽에 세워져 있다. 

레저용 보트나 요트 위한 접안시설이 없다

바지선에서 저녁을 먹고 난 일행이 해변을 산책하다가 주민인 류명식(67세)씨를 만나 대화를 했다. 해군 출신이었다는 그는, 요즈음 학생들이 충무공에 대해 잘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율리안나호 대원들이 노량 주민인 류명식씨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요즈음 충렬사를 찾는 학생들이 충무공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 이순신해전 답사
   
"저는 부모 때부터 노량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즈음 충렬사를 찾는 학생들이 충무공에 대해 잘 몰라요. 노량에 대한 역사성이 사라지고 이충무공에 대한 흠모정신도 약해지고 있어요. 축제를 열기는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 행사가 대부분입니다. 지속 가능한 행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남해 충렬사 뒷편에 있는 이순신 장군 가묘 앞에서 고유문을 읽고 있는 율리안나호 조원옥선장 모습
ⓒ 조원옥
 
한편, 일행이 요트를 타고 항구에 정박할 때 느끼는 애로사항들이 있었다. 요트를 접안할 시설이 부족해 때론 어선에 요트를 묶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그 탓에 다음 날 아침 일찍 출항하는 선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류명식씨에 의하면 "노량 주민들이 레저보트나 요트가 정박할 바지선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평균나이 70인 노익장들의 견학 여행

60~70대 주축이 된 율리안나호가 지난 5월 22일 여수를 출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해전 현장을 찾아 나선 것은 의미가 깊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한 후 432년 만에 돛단배가 처음으로 해전 현장을 방문한 것이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바다, 관음포에 닿다  https://omn.kr/29140 ).

율리안나호의 평균 시속은 5노트로 전쟁 당시의 배보다는 약간 빠르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평균나이 70인 노익장들의 견학 여행이다. 답사를 떠나기 전 임진왜란사를 미리 공부했으니, 역사를 당시로 되돌려보자. 

당시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남해안의 방비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 이순신과 이억기가 전라좌·우수사로 임명되어 전쟁을 준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본과 가까운 경상좌·우수군의 전쟁 대비는 부족했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임 시기를 알 수 없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1592년 초에 부임해 전쟁에 대비할 시간이 부족했다. 다음은 유성룡이 쓴 <징비록> 내용이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감히 출병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도주했고 좌병사 이각은 소식을 듣고 병영에서 동래성으로 들어갔다. 부산성 함락 소식을 들은 이각은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성 밖에서 구원하겠다고 둘러대고 성을 떠나 소산역으로 물러났다."
 
경상우수사 원균도 휘하 세력을 결집하여 함대를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본영 수비를 우후 우응진에게 맡기고 휘하 장수들과 전선 4척의 세력으로 출항해 곤양 해구에 물러나 지키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은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다음은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 기록된 내용이다.
 
"4월 12일 거북선에서 지·현자 총통을 시험 발사하다
4월 15일 경상우수사 원균에게서 왜군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다
4월 19일 신병 700여명이 본영에 도착하다
4월 27일 휘하 장수들에게 수군을 영솔하여 29일까지 좌수영에 도착할 것을 명령하다"
 
그동안 출전 준비를 마치고 4월 30일에 출항하려던 전라좌수영 함대는 일본군에 비해 자신들의 세력이 약한 것을 걱정하였다.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30일 출발해 온다는 전달이 오자 이억기 함대와 합세한 후 출발하기로 결정했지만, 곧 연락이 끊겼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때 녹도만호 정운이 나섰다.
 
"적세가 이미 서울까지 박두했으니 더 없이 통분함을 이길 수 없다. 만약 해전에서도 싸울 기회를 잃고 나면 뒷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녹도 군관 송희립도 출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영남은 우리 땅이 아니란 말인가? 적을 치는데 이 지역 저 지역 차이가 없으니, 먼저 적의 선봉을 꺾어 놓게 되면 본도 또한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5월 4일 새벽 2시경에 여수를 출발한 전라좌수군 함대 85척(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은 5월 6일 원균이 지휘하는 경상우수군 함대 6척(판옥선 4척, 협선 2척)과 합류했다.

이튿날인 7일 새벽 일본 군선이 있다는 가덕도 방향으로 향하다가 정오경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등이 신기전을 쏘아 일본 군선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전라좌수영을 떠난지 4일 만에 조선수군과 일본수군간에 첫 번째 해전이 시작됐다. 조선수군은 일본 함대에 총통과 화살을 쏘기 시작했고 왜수군도 조총을 쏘기 시작했다.
    
 옥포해전모습을 그린 해전도. 옥포해전 기념관을 방문한 지인 박근세씨가 보내왔다.
ⓒ 박근세
       
이순신 함때는 옥포해전에서 일본의 대선 16척, 중선 6척, 소선 2척 등 모두 26척을 분멸했다. 첫 전투에서 승리한 이순신 함대는 합포와 적진포에 주둔해 노략질하던 일본 함대도 격파했다. 조선수군은 1차 출전을 통해 일본의 대선 26척, 중선 9척, 소선 2척 기타 선박 7척 등 44척을 격파했다.
<임진왜란 해전사>를 쓴 이민웅은 제1차 해전의 승리 요인을 이렇게 정리했다.
 
"이순신 함대가 일본 수군을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총통 등의 화기와 전선(판옥선)의 성능이 우수했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 우리 함대에 맞선 일본 수군이 30척 미만의 함대였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첫 출전의 승리로 조선수군이 자신감을 갖게 됐고 이순신의 역사도 시작됐다. 여수에서는 이순신이 출전한 날을 기려 매년 진남제를 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와 광양경제신문에도 송고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