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며 묵상한다, 나의 갈 길을
크리스천 러너에 달리기를 묻다
지난 3월에만 20개가 넘는 마라톤대회가 열릴 만큼 한국 사회에는 러닝(Running) 열풍이 불고 있다. 계속해서 늘어가는 달리기 인구 중에는 크리스천도 적지 않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달리기’를 검색하면 크리스천 러너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신약성경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신앙인의 삶을 달리기에 비유한다. 신앙생활과 달리기는 언뜻 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성경을 읽다 보면 곳곳에서 달리기에 대한 언급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달리기를 통해 신앙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어봤다. 그리고 그들을 만나 함께 달리며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난달 31일 아침 8시, 서울 중랑구 중랑천 장미길. 고한민(41) 배우(꽃동산교회 집사)와 달리기를 시작했다. 만개한 장미가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고 배우는 2012년 영화 ‘개들의 전쟁’에서 종복 역을 맡으며 데뷔한 베테랑 연기자다. 최근에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과 ‘비밀의 숲’ 등에서 인상 깊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현재 사극을 촬영 중이라는 그는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진 머리를 휘날리며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1000일 넘게 매일 달리기를 해 온 러너답게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빠도 저 사람들처럼 달릴 수 있어?” 4년 전 함께 산책을 나온 딸의 질문이 그를 달리기로 이끌었다고 한다. 특히 코로나로 현장이 사라진 시기, 배우로서의 삶에도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그에게 달리기는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고 배우는 “군 복무를 하다가 십자인대와 연골판을 심하게 다쳐 지체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며 “지속적인 달리기를 통해 장애를 잊을 만큼 몸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는 현재 작품 활동과 함께 철인3종경기에도 도전하고 있다.
고 배우에게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묵상런’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글을 올려온 그는 매일 새벽 김동호 높은뜻연합선교회 목사의 유튜브 채널 ‘날마다 기막힌 새벽’을 들으며 길에 나선다고 했다.
오르막에 접어들자 숨이 차올랐다. “괜찮아요?” 고 배우는 걱정스레 물었다. 그의 격려에 힘입어 페이스를 다시 찾고 인터뷰를 이어갔다.
“달리기를 통해 연기 생활에서도 자신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특히 묵상런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겸손해질 수 있었습니다. 마라톤을 뛸 때도 3시간 동안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자는 마음으로 뛰어요.” 2022년 인생 첫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51분의 기록을 세운 그는 꾸준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60대 중반인 저희 부모님도 저를 보고 달리기를 시작했다”며 “달리기는 신체 건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했다.
‘크리스천 러닝 크루’에 대한 아이디어도 내놓았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각자 있는 자리에서 스마트 장비를 활용해 원격으로 대화를 나누며 달리는 거죠. 서로 격려도 하고 신앙 이야기도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최종은(39) 경기도 여주 능서상동교회 목사와의 달리기는 지난 5일 여주보에서 진행했다. 오전 11시, 머리 위로 솟아오른 태양이 이제 막 열기를 뿜어내려 하고 있었다. 여주보는 이 지역 러너들과 라이더들의 성지로 불린다. 여주보에는 이날도 적잖은 이들이 달리고 있었다. 길가에 만개한 노란 금계국이 더위로 인한 짜증을 씻어줬다. 보 너머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경쾌한 리듬을 더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최 목사는 신약성경 히브리서 12장 1절을 언급하면서 달리기가 신앙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달리기를 통해 ‘신앙의 경주’를 실천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최 목사의 주장이다. 그가 본격적인 달리기에 나선 건 지난해 8월이다.
“단독 목회를 하면서 몸이 여유로워지다 보니 체중이 많이 늘었고 몸도 찌뿌둥해졌어요. 유튜브에서 가수 션의 ‘기부런’ 영상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아 달리기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예배가 있는 수요일과 주일을 제외하고는 달리기를 쉬지 않았다. 덕분에 1년도 채 되지 않아 그의 체중은 70㎏에서 60.5㎏으로 줄었다. 체력이 좋아진 건 물론이고 피부 상태도 좋아졌다고 했다. 최 목사는 “주기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하다 보니 밥맛도 좋아지고 피부도 좋아졌다”고 했다.
그는 특히 목사들에게 새벽예배 이후 시간은 달리기에 최적의 시간이라고 꼽았다. 최 목사는 “이 시간은 목회자들에게 가장 고민되고 공허한 시간”이라며 “더 쉴까 잘까 망설이지 말고 건강도 챙기고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을 활용하면 좋겠다”고 권했다. 달리는 시간 동안 최 목사는 목회 사역과 삶을 계획하고 성도들에 대한 고민을 정리한다고 했다. 그는 “사역하며 난제가 있을 때 새벽예배를 마치고 묵묵히 자동으로 뛰러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달리기는 소통과 관계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됐다. 달리기에 관심이 있는 청년 교인과 주말마다 함께 달리며 영적 대화를 나누는 계기를 마련했고 자신의 첫째 아들과도 자주 함께 달리며 부자간 유대감도 키웠다. 최 목사는 달리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정직함을 꼽았다. 자신이 뛴 만큼의 거리가 나오고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 달리기는 신앙생활과 닮았다고 했다.
인스타그램 계정 ‘샬로믹데이클럽’은 장로회신학대 신대원 출신 김지환 전도사가 운영하는 교회 밖 청년들을 위한 신앙모임이다. 김 전도사는 지난달, MZ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러닝을 ‘이달의 테마’로 선정해 신앙 성장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그는 러닝이 단순한 운동을 넘어 기도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러닝 시간을 정하고 카톡방에 인증과 묵상 내용을 공유하며 서로 응원하도록 이끌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한 참가자는 “처음엔 단순한 운동이라고 생각했지만 달리면서 자연을 느끼고 묵상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교감을 할 수 있게 됐다”고 감상을 전했다. 또 다른 참가자는 “비 오는 날을 통제할 수 없듯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더 알게 됐다. 내가 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피드백을 남겼다.
달리기 취재를 기획한 이후 기자도 달리기를 시작했다. 한 달 동안 30㎞가량을 달렸다. 묵상런도 시도해봤다. 실제 달리기를 하는 동안 고요하게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러너들이 말한 달리는 순간의 쾌감도 어렴풋하게 느낀 것 같다. 꾸준하게 달리지 않은 탓인지 체중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글·사진=손동준 기자 sd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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