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누구의 시간인가

박상은 2024. 6. 15.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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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은 사회부 기자


직장인인 당신에게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월급은 얼마인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할 수는 있지만 답을 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그럼 다음 질문은 어떨까. ‘당신의 시급은 얼마인가요?’

아르바이트생 같은 단시간 근로자에게만 적용되는 시급을 말하는 건 아니다. 전일제 근로자도 자신의 월급을 한 달 근로시간으로 나눈다면 그 금액을 대략적인 시급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계산법 앞에서 머뭇거리며 답을 미루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이 질문은 근로시간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데, 매일 자신이 일한 시간을 기록하고 누적 근로시간을 확인하는 직장인은 드물 테니까 말이다. 주40시간을 넘어선 연장근로가 잦을수록 두 번째 질문에 답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일부 수당을 근로시간과 관계없이 지급하는 포괄임금제를 적용한 직장에서 일한다면 더욱 그렇다.

일감에 따라 보수를 받는 플랫폼 노동자나 프리랜서가 늘고 있긴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노동자의 시간=돈’이라는 명제는 변함 없다. 매년 이맘때 노사가 치열하게 논의하는 최저임금의 기준 역시 ‘시급’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최저임금제를 도입한 대부분 국가가 동일하다. 노동자의 근로 가치를 시간으로 책정한다는 건 노동자의 시간이 곧 상품이라는 의미다. 엄밀히 말해 하루 8시간 일하는 전일제 근로자든, 하루 3시간 일하는 단시간 근로자든 모두가 시간을 기준으로 일하는 시간제 근로자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연봉이나 월급으로 소득을 비교할 뿐 개개인의 ‘시간당 노동 가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근로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필요성은 느끼지만 이를 위해 근로시간을 능동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은 여전히 미약하다. 줄어든 시간만큼 시간당 노동 가치를 높이기 위한 고민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근무체계가 보편화됐다는 이유로, 시급이 아닌 연봉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 주권을 내려놓았는지 모르겠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훨씬 적극적인 근로시간 감축이 필요한 나라다. 2022년 기준 OECD 회원국은 연평균 1719시간 일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국은 1901시간으로 182시간 많았다. 한국은 노동시간당 산출되는 부가가치를 나타내는 시간당 노동생산성도 하위권이다. 지난해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9.4달러로, OECD 평균의 4분의 3 수준이었다. 자신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에 만족하는 이들도 적은 데다 주어진 시간 동안 효율적·생산적으로 일하는 근로자도 적다는 뜻이다.

좋은 휴식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는 책 ‘타임 오프’의 저자는 ‘시간당 임금을 받으니 일을 빨리하면 받는 보상이나 칭찬은 사라지고 대신 무의미한 분주함이라는 징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을 마쳐도 고용주가 사무실에 있도록 급여를 줬기 때문에 일터를 떠나지 못하고 개인의 생산성을 ‘바쁨’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도한 근로시간이 양질의 일을 보장하지 않는다. 훌륭한 근로 윤리는 본질적으로 일의 양이나 분주함이 아닌 질에 관한 것이다. … 탁월한 쉼 윤리는 그저 일 덜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양질의 근로와 양질의 휴식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저자의 말처럼 시간당 노동 가치를 안다는 건 시간당 휴식의 가치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다.

유럽에선 근로시간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개인이 자신의 시간을 배분·선택하는 시간 주권 논의가 이미 20여년 전에 이뤄졌다. 이를 법제화한 네덜란드 등에선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오래 일할 것인지 노동자가 스스로 결정한다. 물론 여기에는 기한에 맞춰 결과물을 낸다는 신뢰와 책임이 뒷받침돼 있다.

하루 8시간으로 설정된 근로시간을 여름에만 6시간으로 줄일 수 있다면 어떨까. 재택근무를 통해 근무시간을 아침 저녁으로 나눌 수 있다면? 시간 주권을 확대하고 회복하는 건 ‘잘’ 일하고 ‘잘’ 휴식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한국에선 너무 먼 미래라고 고개를 젓기 전에 한 번쯤 상상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욕심내길 바란다. 시간 노동자인 우리의 하루는, 분명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박상은 사회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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