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속독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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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자신을 '속독 고수'라고 소개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명함을 보니 그는 속독학원 같은 걸 운영하는 것 같았다.
명함을 받아 든 나는 속독의 달인이 속독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그만 돌아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준 것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고 한 다음 달인은 유유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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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자신을 ‘속독 고수’라고 소개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는 개그맨 누군가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언뜻 떠오르지는 않는다. 어쨌든 상당히 웃기게 생긴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은 헌책방에 와서 자기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책방을 한 바퀴 돌며 책장을 훑어보더니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뭔가 읽을 책이 좀 없을까요…”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경계심을 풀지 않은 채로 박민규 작가의 소설 ‘핑퐁’을 건넸다. “약간 특이한 책인데 읽어보셨을지 모르겠네요”라고 하자 그는 무심하게 책을 받아 즉시 빠른 속도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약 5분 만에 책이 되돌아왔다.
“다 읽었습니다. 다른 건 뭐 없나요?” 이상한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번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찾아 내밀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 책도 5분 만에 끝냈다. 세 번째는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다. 꽤 분량이 많은 소설인데 그는 전보다 속도를 더 높여 3, 4분 만에 다 읽었다며 책을 돌려줬다.
그렇게 책장을 마구잡이로 넘기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황당함을 넘어 당황스러움까지 느껴졌다. 하루키 책마저 넘겨받았을 땐 나도 모르게 ‘풋’ 하며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워낙 책을 좋아하다 보니 특별한 훈련을 거쳐 속독의 최고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거다.
나는 속으로 ‘네, 뭐, 그러시든지요’ 하면서 이제는 얼른 이 손님이 밖으로 나가 주기만을 은근히 바랐다. 이때 그의 본래 목적이 드러났다. 속독의 달인은 문득 사무적인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며 말했다.
“서점에서 일하시니까 속독에도 관심이 있으시겠죠? 언제든 연락 주세요.”
명함을 보니 그는 속독학원 같은 걸 운영하는 것 같았다. 명함 뒷면엔 수강료도 보였는데 외국어 시험처럼 몇 단계 코스로 나뉘어 있고 가격은 모두 ‘시가’라고만 쓰여 있었다. 속독이 무슨 킹크랩 요리도 아닌데 ‘시가’가 웬 말인가.
명함을 받아 든 나는 속독의 달인이 속독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그만 돌아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윽고 발길을 돌리는 그에게 나는 “그렇게 책을 빨리 읽으시다니, 스티븐 디덜러스처럼 훌륭한 재능이네요”라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속독의 달인은 내 말이 맘에 들었는지 “스티븐 디덜러스, 유명한 작가인가요?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을 만큼 멋진 이름이군요” 하며 감탄했다. 그런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준 것에 대한 감사도 잊지 않고 한 다음 달인은 유유히 사라졌다.
기묘한 손님이 가고 난 다음 나는 곧장 명함을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스티븐 디덜러스’가 방금 읽은 책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개그맨을 닮은 게 아니라 정말 개그맨인지도 모르겠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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