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카는 이슬람 도시 아니었다…주목받는 '남양의 이슬람화'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16>]

김기협 2024. 6. 1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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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1902-1985)의 〈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와 지중해세계 La Méditerranée et le monde méditerranéen à l'époque de Philippe II〉(1949)를 20세기 역사학계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책을 읽지 않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 후의 많은 중요한 연구에 인용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중요성은 역사 탐구가 시간적-공간적으로 확장하는 길을 연 데 있다. 시간적 확장은 ‘사건의 시간’-‘문명의 시간’-‘자연의 시간’의 층위 분석으로 이뤄졌다. 고고학, 인류학, 언어학 등 여러 분야 학문이 역사 탐구에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길을 여는 데 공헌했다.

공간적 확장은 ‘지역사’의 발전을 불러왔다. ‘국가사’의 울타리에 묶여 있던 역사학에 새로운 기준을 도입한 것이다. 지역사의 시도는 그 전에도 늘 있었지만, 역사학계의 주변적 현상에 그쳤다. 역사학 발전의 중심축으로 나아가는 데 브로델의 연구가 계기가 되었다.

Fernand Braudel, La Mediterranee et le monde mediterraneen a l'epoque de Philippe II 1권(2017, 제5판). 인용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읽지 않고도 읽은 것 같은 책이다. 작업에 쫓기는 형편을 벗어나면 제대로 읽고 싶다.

지중해에 ‘지중해세계’가 있었듯 인도양에는...


키르티 차우두리(1934- )의 〈인도양의 교역과 문명 Trade and Civilisation in Indian Ocean: An Economic History from the Rise of Islam to 1750〉(1985)은 브로델의 아이디어를 이어받은 연구다. 브로델이 ‘지중해세계’를 역사의 한 무대로 꾸민 것처럼 차우두리는 ‘인도양세계’를 또 하나의 무대로 제시한다.
K N Chaudhuri, Trade and Civilisation in Indian Ocean: An Economic History from the Rise of Islam to 1750.


인도양은 지중해와 공유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연안에 문명 발전이 빠른 지역들이 널려있었고, 항행이 쉬운 편이었다. 그래서 인도양 연안의 문명과 문화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인도양세계’에 시선을 맞추면 여러 문명권 사이에 펼쳐진 역사를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 차우두리의 관점이다.

차우두리의 ‘인도양세계’는 시베리아를 제외한 아시아 전체와 아프리카 동해안 일대를 포괄하는 영역이다. 항해와 교역이 활발했던 해역에 그 배후지역까지 더한 것이다. 배후지역은 차치하고 해역부터 살펴본다면 국제수로기구가 획정한 인도양에 동남아시아 해역을 합친 것이다.

국제수로기구(International Hydrographic Organization)가 2002년 획정한 5대양의 영역. 동남아 해역 중 자바해(보르네오섬과 자바섬 사이)만 인도양에 속하고 나머지는 태평양에 속한다.

국제수로기구에서 뭐라 하든 역사 속에서 동남아 해역은 인도양과 단단히 맞물려 있었다. 동남아 해역을 ‘오스트랄라시아 지중해(Australasian Mediterranean)’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글에서는 ‘남양’이다. 내가 그리려 하는 남양사의 “남양”은 지중해 바다 위에 브로델이 그린 ‘지중해세계’처럼 남양 바다 위에 그리는 ‘남양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남양과 인도양의 관계를 에게해와 지중해의 관계에 비교하는 생각이 든다. 섬들이 촘촘하게 어울려 있는 남양에서 먼저 항해 활동이 발달한 다음에 더 넓은 바다로 나가게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못을 쓰지 않고 밧줄로 선체를 얽어매는 조선술(lashed lug)은 남양에서 개발된 것인데, 10세기경까지 이슬람권에서 이 방법이 쓰인 사실이 침몰한 중세 선박의 인양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인도양세계에서 남양인의 역할이 더욱 궁금해진다.


‘통과 지역’에서 ‘중계 지역’으로 자라난 남양


차우두리는 10세기경 남양 항로에 일어난 분절(分節) 현상을 지적한다. 그 전에는 페르시아 쪽에서 중국까지 다니는 배들이 있었는데, 말라카해협(수마트라섬과 말레이반도 사이) 언저리를 기준으로 어느 한쪽만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항해술이 발달하고 배가 커지면 항로가 길어질 것 같은데, 오히려 토막난 이유가 무엇일까? 차우두리는 항해의 효율성을 이유로 제시한다. 인도양과 남양(남중국해)의 풍향에 차이가 있어서 같은 배로 양쪽 항로를 이어서 다니려면 바람을 기다리는 데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이후의 연구자들도 대개 그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몬순기후대에서 풍향은 봄과 가을에 바뀐다. 페르시아 방면에서 말라카해협까지 바람을 타면 한 달 남짓 걸리는데, 그 길을 돌아가려 해도 상당한 기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자연지리보다 인문지리 측면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통량이 늘어났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왕래가 적을 때는 가치가 높은 상품만 싣고 다니다가 배가 늘어나면서 부피가 큰 생필품도 옮기게 된다. 그렇다면 중계항에 싣고 온 화물의 대부분은 현지 시장에 풀고 더 멀리 갈 귀중품만 다른 배에 옮겨 싣는 관행이 생겨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항로의 전문화로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이런 관행은 중계항 일대의 시장 규모가 자라난 상황에서 가능하다. 남양 일대의 경제활동이 빈약할 때는 동양(중국)과 서양(인도, 페르시아) 사이를 다니는 배들이 빨리 지나가려고만 했다. 향료 등 남양 특산물의 수출이 꾸준히 자라나는 데 따라 소비시장도 성장했기 때문에 단순한 경유지가 아닌 교역 중심지(emporia)가 된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다른 세계’와 이븐 바투타의 ‘우리 세계’


차우두리는 7세기 이슬람 흥기를 고찰의 출발점으로 한다. 인도양세계의 장기적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교역의 확대가 그 변화의 중심축이었다.

마호메트 자신이 상인 출신이었다는 점을 들어 이슬람 율법이 교역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는 주장이 있다. 굳이 마호메트의 경력이 아니라도, 이슬람 발생의 시기와 장소에서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주요 종교들이 농업 발전의 시대에 나타난 것과 달리 이슬람은 상업 발전의 시대에 나타났다. 그리고 농업이나 제조업보다 상업활동이 더 활발하던 아라비아반도에서 발생했다.

이슬람의 상업친화적 성격은 동남아에서 확실히 나타났다. 이슬람의 동남아 지역 전파는 7세기부터 흔적을 남겼으나 개종자가 상당한 인구비율을 점하게 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그동안 이슬람 전파는 교역로 주변에서 진행되었다.

지금의 동남아에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남부) 등 해양부에 대륙부보다 이슬람 인구비율이 높은 것도 그 결과다. 대륙부의 해안지대에도 이슬람이 많이 전파되었지만 농업국가 ‘나가라’에서는 주변부 현상에 그쳤다. 반면 해양부의 교역국가 ‘네게리’에서는 해안지대의 이슬람이 내륙의 농업지대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마르코 폴로와 이븐 바투타는 각각 13세기 후반과(1271-1295) 14세기 초반의(1325-1354) 활동으로 ‘대(大) 여행가’의 명성을 남겼다. 그런데 두 사람의 여행 스타일은 달랐다. 폴로가 낯선 곳에서 현지 언어를 배워 이방인으로 살아간 반면 바투타는 이슬람세계(Dar al-Islam) 안에서 아랍어만 쓰며 이맘(Imam; 학자-종교인)으로 대접받고 다녔다. 이슬람세계를 벗어난 기간이 짧고, 그럴 때도 (중국 같은 경우) 현지 무슬림 집단만을 찾아다녔다.

폴로는 유럽인에게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바투타는 ‘우리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확인한 것이다. 바투타의 ‘우리 세계’는 교역 활동을 통해 넓혀진 것이었다.

타타르 복장의 마르코 폴로.
쥘 베르느 작품의 삽화에 그려진 이븐 바투타의 모습.
콜럼버스의 메모가 적혀 있는 라틴어판 〈동방견문록〉.
1836년 카이로에서 출판된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이슬람 확장’이 남양보다 빨랐던 중국


동남아에서 발견된 이슬람 금석문은 1020년대 이후의 것이므로 이 무렵에 안정된 세력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금석문들이 발견된 곳은 역시 말레이반도의 파항(1028), 참파(1029, 1039), 브루네이(1048), 자바섬 동부(1082) 등 교역의 요충지로 볼만한 장소들이었다.

1400년경 세워져 교역의 요충지로 떠오르는 말라카는 처음에는 이슬람 도시가 아니었다. 창설자 파라메스와라의 이름이 힌두식이다. 이스칸달샤라는 이슬람식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개종하면서 바꾼 이름이라고 한다. 1409년 또는 1414년에 개종했다는 설이 있고, 그 후계자(아들이나 손자)가 더 뒤에 개종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여러 자료의 기록이 엇갈려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일인데, 분명한 것은 말라카가 교역도시로 자리 잡은 뒤에 이슬람 도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1406년 이후 여러 차례 말라카에 들른 정화 함대가 길을 열어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시기에는 남양보다 중국에 이슬람 인구가 훨씬 더 많았다.

중국에는 7세기 말 당나라 때부터 회교도가 많이 들어왔다. 중앙아시아에서 서북부로 들어오기도 하고, 남양을 통해 동남해안에 자리 잡기도 했다. 원나라 때 색목인의 다수가 회교도였고 명나라가 일어설 때 남옥(藍玉) 등 회교도 장군들의 역할이 컸다. 명 태조가 색목인 회유를 위해 하사한 “백자찬(百字讚)” 편액을 지금도 걸어놓고 있는 모스크들이 중국에 있다.

지금의 중국에는 회교도 집거구역이 신장 등 서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지만, 명나라 초까지 회교도 집단이 많은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양의 이슬람화가 교역로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과정에는 중국 회교도 집단의 역할도 작지 않았을 것 같다. 정화 함대가 말라카의 독립을 지원하고 팔렘방에서 시진경을 선위사로 세운 것이 그 예일 것이다.


‘인도양세계’를 그린 또 하나의 책


차우두리의 1985년 책을 거론하면서 그와 함께 ‘인도양세계’를 그린 재닛 아부-루고드(1928-2013)의 〈유럽 패권 이전 Before European Hegemony: The World System A.D. 1250-1350〉(1991)을 언급해 둔다. 차우두리의 책에 비해 짧은 시간의 넓은 공간을 다루면서 ‘인도양 세계체제’를 제안한 책이다.
Janet Abu-Lughod, Before European Hegemony: The World System A.D. 1250-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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