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요괴만화 전설의 역대급 명작, 놀라움이 가득하다
[김상목 기자]
▲ 영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포스터 이미지 |
ⓒ (주)엔케이컨텐츠 |
<게게게의 기타로>는 일본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1922-2015)의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작이자, 현대 일본인들에겐 '요괴 만화' 그 자체라 할 만큼 세대를 초월한 문화체험으로 개별 만화를 뛰어넘는 '고전'에 가까운 작업이다. 그와 동시기 활동한 거장이라면 <철완 아톰> 시리즈의 데즈카 오사무, <가면라이더> 시리즈의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미즈키 시게루가 가장 나이가 많은 데다가, 그는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활동기간이 반세기를 뛰어넘을 정도다. 데즈카 오사무라는 이름이 갖는 일본 만화에서의 위상을 생각하면, 미즈키 시게루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새삼 각인될 법하다.
'요괴 만화'라 하면 우리는 쉽게 저학년 아이들의 말초적 호기심에 기대는 단순한 내용과 정형화된 이미지로 치부하기 쉽지만, 미즈키 시게루는 동시대 다른 기존 유파나 경향을 참고하지 않고 발품을 팔아 일본 각지는 물론 한국과 중국, 여타 아시아 국가는 물론 전 세계의 전설과 괴담을 조사해 독창적인 화풍과 결합한 끝에 어떤 경지에 도달한 작가다. 사실상 현대 일본인들이 어릴 적부터 갖게 된 '요괴'의 이미지와 존재감은 미즈키 시게루의 작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거기에다 단지 독창적 디자인을 넘어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 세계 각국의 고유한 요괴 형상을 재현하는 솜씨를 인정받은 덕분에, 만화가라면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을 국내외 모두 석권한 경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난 만화가는 일본에 차고 넘친다. 미즈키 시게루란 이름이 거대한 건 그의 만화 속 이미지가 보여주는 엄청난 화풍도 일조하지만, 대중적으로 읽히면서도 흡입력 높고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것도 작가의 확고한 세계관과 시각을 놓지 않으면서도 풀어내는 이야기꾼의 탁월함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남녀노소 전 세대가 그의 대표 만화들을 보면서 성장했기도 하지만, 그가 보여준 작품 속 이야기들은 본인이 겪은 격동의 역사와 함께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탄압당하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부조리에 대한 단호한 거부, 생명의 가치 옹호와 함께 터무니없는 권위주의와 부질없는 전쟁에 대한 회의로 가득하다. 그런 다양한 면모 덕분에 처음엔 부담없는 요괴만화로 입문해 점점 현대 역사와 전쟁 관련 사회물로 이행하며 작가의 작품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거대한 산을 오르는 재미라 하겠다.
▲ 영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스틸 이미지 |
ⓒ (주)엔케이컨텐츠 |
그런 미즈키 시게루의 대표작 <게게게의 키타로>는 1950년대에 마치 동네 서커스 유랑극단처럼 골목을 돌며 공연되던 그림연극에 기원을 둔 작업이다. 그 당시엔 현재 출판만화의 기본 공식이던 만화잡지 연재 후 단행본 출간 패턴도 확립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만화잡지라는 게 탄생하기도 전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도 기성세대라면 추억 속의 공간일 만화대본소(만화방)가 동네마다 있었다. 그런 아득한 시절부터 출발해 다양한 결로 확장된 시리즈인 데다 워낙 대단한 인지도를 갖고 있기에 애니메이션화도 일찍 시작되었고, 10년 주기로 공중파 방송국에서 시즌 형식으로 새로운 시리즈가 방영되는 중이다.
워낙 세대를 초월한 인기작이다 보니 1960년대부터 10년마다 텔레비전 방송이 이뤄지고 있다. 매년 이어지는 것과 10년 주기 연속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 전자가 당대 인기에 힘입어 후속편이 제작되는 거라면, 후자는 세대가 바뀌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예습과 복습을 가미한 '체험학습' 격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신판으로는 2018년부터 후지테레비에서 시즌6이 방영된 바 있다.
매 시즌 텔레비전 방영이 마무리될 때쯤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총집편'(TV 방영분량 요약판)이 제작되어 극장 개봉에 이른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여러 매체 협업으로 '미디어믹스'가 진행된다. <게게게의 키타로>는 그렇게 인쇄만화와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극장판 애니메이션, 일본 특유의 특촬물(특수촬영물), 심지어 만화 제작배경을 다룬 연속드라마까지 세상에 선보이며 무한 확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가장 최근 시리즈인 여섯 번째 TV 방영분은 작가가 세상을 떠난 후 처음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중파에서 방영된 지 50주년 기념작이라는 의의도 겸비한 여러모로 의의가 큰 작업이다. 하지만 과연 원작자가 세상을 떠난 후 온전하게 작가의 비전이 구현될 수 있을까, 요즘 유행에 영합하며 변질되는 건 아닐까 하고 오래된 팬들은 조마조마해질 수도 있는 도전일 테다.
하지만 워낙에 확고부동한 작품세계와 독자적인 의식을 가진 대작가의 대표작이니만큼, 다행히 함부로 훼손할 엄두를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그저 눈요깃감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의견과 관점을 분명히 담아내기에 그런 작가의 태도를 존중한 계승자들은 원작자가 봐도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탄생 100주년 기념작으로 그렇게 6번째 텔레비전 시리즈의 결정판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가 완성되었다.
그런 상징적인 의미도 차고 넘치지만, 이 최신판은 그런 허들을 가뿐히 뛰어넘어 다른 단계로 올라가려 한다. 바로 이 만화의 주인공이라 할 '키타로' 탄생 기원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60여 년 넘게 거대한 세계관의 중심으로 확장된 '키타로'가 어떤 출생의 비밀과 사연을 품고 있는지는 원작 팬이라면 누구나 궁금할 일이지만, 어설프게 다뤘다가는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패륜으로 찍힐 건이다. 하지만 원작자의 정신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이 극장용 버전의 제작진은 고민한 흔적이 가득하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충실한 후계자들은 답습에 그치지 않는다. 미즈키 시게루가 떠난 자리에 남은 현대 일본이 빠지기 쉬운 위험, 작가 본인이 경험한 격동의 현대사와 비참한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데 대한 근심과 고언이 추가된다. 그런 고민이 녹아든 결과물은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시험하는 듯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 영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스틸 이미지 |
ⓒ (주)엔케이컨텐츠 |
주인공 '키타로'와 '눈알'만 남은 그의 아버지가 이미 폐허가 된 첩첩산중 나구라 마을 터로 들어선다. 그들은 70년 전 이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의 자취를 찾아 돌아온 것이다. 키타로나 '눈알 아버지'나 거대한 운명의 분기점이던 과거의 사건 관련 남은 처리가 있는 듯하다. 거기에 눈치 없이 폐간 직전 잡지의 기자 '야마다'가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른 채 들쑤시며 들어온다. 그리고 과거에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이 '눈알 아버지'의 회상으로 소개된다.
때는 '쇼와 31년(1956년)'의 도쿄에서 출발한다. 일본혈액은행에서 근무하던 '미즈키'는 중요한 거래처이자 일본 제약계를 좌지우지하며 거대한 권력과 부를 쌓아 올린 류가 일족의 당주 토키사다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류가 제약의 전매특허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회사는 미즈키를 파견한다. 미즈키 역시 큰 건을 해결해 출세하려는 야심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류가 일족의 본거지 나구라 마을은 외부와 고립된 채 가문의 영지처럼 굴러가는 곳이다. 석연찮은 게 한둘이 아니다. 원래 류가 제약 사장인 데릴사위 카츠노리가 당주 지위를 계승할 것이라 기대했던 미즈키는 예상과 다른 유언장 내용에 당혹스럽다.
하지만 충격적인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류가 일족은 뭔가 비밀을 가득 품은 수상쩍은 모양새고, 주민들은 외지인인 미즈키를 적대하고 감시한다. 설상가상 마을 밖으로 나가는 통로도 산사태로 무녀졌다고 한다. 완전히 고립되어 경찰을 비롯해 외부 도움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즈키는 또 다른 외부인의 존재를 확인한다. 오래전 잃어버린 아내를 찾으러 왔다는 그의 정체는 바로 키타로의 '눈알 아버지'였다.(이 당시는 키타로의 판박이 외모다) 류가 일족 내 후계자 다툼 속에서 선대 당주를 추모하는 의식이 거행되던 중, 일족의 유력자가 살해당한다. 그리고 괴기스러운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도쿄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초현실적 상황이 거듭되고, 미즈키는 수상한 남자 '게게로'나 카즈노리의 딸 '사요'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의지할 곳이 없는 상황으로 빠진다. 그 역시 모종의 숨은 목적을 쫓아 개인적인 조사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가 조금씩 눈을 뜨게 된 진실은 평범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류가 일족의 권력과 부의 원천은 충격이란 표현으로 형언하기 힘든 차원에 도달하고 있었다.
▲ 영화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스틸 이미지 |
ⓒ (주)엔케이컨텐츠 |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에 대한 평은 대단히 높은데 내용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개 이런 경우 글쟁이들이 게을러서거나 놓치는 경우를 의심하겠지만, 영화를 확인하고 나니 필자 역시 이심전심으로 왜 다들 그랬는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말았다. 손가락으로 키보드 눌러서 후다닥 몇 줄 휘갈기는 것으로 이 작품을 압축한다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대하는 흔한 선입견으로 소화할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를 마치 피를 토하듯 담아내고 있었다. 정말 문자 그대로였다.
<게게게의 키타로>는 작가의 오리지널 만화에서도 시간을 축적하며 광대무변한 확장을 선보였던 '대하만화'다. 그리고 갈수록 더 심각하고 심오해져 갔다. 세상에는 '인간'과 '(비인간) 동물', 그리고 우리가 초자연적 현상이라 통칭하는 '요괴'가 존재한다. 키타로는 그중 요괴에 가까운 '유령족'의 마지막 후예로 강력한 능력을 지녔지만, 늘 인간 사회를 겉돌며 배척 당하는 '안티히어로'에 가까운 존재다. 그는 인간 세상의 온갖 어두운 면과 원한을 목격하고, 인간의 폭주에 의해 터전을 잃고 쫓겨나는 동물과 요괴들을 응시한다.
세상의 그늘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사악한 요괴들을 물리치지만, 그에게 정당한 찬사와 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왜 인간을 돕는 걸까 보는 독자들도 의구심을 표할 정도다. 그런 주인공의 복잡한 속내가 점점 더 나쁘게 변해가는 인간 사회와 어우러질 때 이야기는 점점 더 심각하고 복잡해진다. 최신판에 이르러서는 그 결정판에 가까워졌다.
스포일러는 언급하지 않고 상상에 맡기는 게 옳겠다. 다만 역사의 교훈을 애써 외면하는 기득권 집단과 제대로 기성세대의 한계를 체감하지 못한 현재 청년세대가 공동으로 나아가는 위험한 미래에 대한 충고를 놓지 않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이 필사적으로 펼치는 응전의 궁극 형태로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는 그야말로 정점에 선 결과물임에 분명하다. 누군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를, 누군가는 토미노 요시유키와 오시이 마모루를, 누군가는 안노 히데아키를 떠올릴 테다. 그런 이들의 고민들과 한 궤로 상상해도 전혀 틀리지 않다.
영화에는 <게게게의 기타로> 확장세계의 무수한 구성요소가 빼곡한 데에 더해 이 작업으로 100세 생일 선물을 수령하게 된 미즈키 시게루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남방전선'에 징집되어 미얀마 라바울 일대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겪었다. 결국 부상으로 인해 한팔을 절단하고 목숨만 부지해 살아 돌아왔다. 그런 작가의 인생경력이 영화 속 '미즈키'에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다. 무의미한 전쟁과 희생을 강요하는 권력자들의 허울 뿐인 '대의', 전쟁으로 인한 책임은 도외시한 채 기득권을 움켜쥐고 전후에도 여전히 권력과 부를 향유하는 자들에 대한 분노가 주인공을 통해 전면화된다.
<작품정보> |
키타로 탄생 게게게의 수수께끼 鬼太郎誕生 ゲゲゲの謎 (The Birth of Kitaro: The Mystery of GeGeGe) 2023│일본│애니메이션 2024.06.12. 개봉│105분│15세 관람가 감독 코가 고 출연 사와시로 미유키, 노자와 마사코 원작 미즈키 시게루 수입 ㈜엔케이컨텐츠 공동제공 ㈜에스피오엔터테인먼트코리아, ㈜디스테이션 배급 ㈜디스테이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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