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하다고? 시작하면 도전이 된다" 아시아의 물개가 남긴 메시지

이준목 2024. 6. 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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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이준목 기자]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1952-2009)은 대한민국 수영의 역사를 바꾼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그저 수영이 너무 좋아서 땅끝마을 해남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던 순수한 시골 소년은, 이후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대한해협 횡단, 연이어 한국 신기록 경신 등, 위대한 업적들을 남기며 한국 수영 역사상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불멸의 전설로 남았다.

조오련이 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삶을 살아야만 했던 원동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6월 13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그가 전설이 된 이유 -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편을 통하여 수영 영웅 조오련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1968년 11월 서울 종로의 YMCA 건물, 까까머리 앳된 소년이 한 중년 남자와 실랑이를 벌였다. 소년이 수영장 회원권을 어설프게 위조하여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직원에게 적발된 것이다. 수영이 너무나 하고 싶었던 소년은 "성공해서 꼭 갚겠다. 수영만 하게 해달라" 통사정했다.

당시 196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수영은 대중적인 스포츠라기보다는 고급 운동 정도로 여겨졌다. 국내에 정식 수영장은 단 세 곳 뿐이었고, 그중에서도 연습용 수영장으로 운영되던 곳은 소년이 찾아온 YMCA 수영장뿐이었을만큼 환경이 척박했다. 직원은 소년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서 벌로 수영장 청소 일을 하는 조건으로 사용을 허락해줬다.

소년의 이름은 바로 조오련. 저 멀리 전라도의 땅끝마을인 해남에서 수영이 하고 싶어서 학교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온 상황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며 진로에 대하여 고민하던 조오련은 우연히 아빠를 따라 제주도에서 관람했던 수영 대회를 보고 저들보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조오련은 수영 선수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들고 온 용돈을 탈탈 털어서, 수영인들의 메카라는 YMCA 수영장에 무작정 등록한 것이었다. '내가 성공할 길은 수영 뿐이다. 성공하기 전엔 안 내려가겠다'는 것이 당시 조오련의 다짐이었다고.

까까머리 소년은 금세 수영장의 유명인사가 됐다. 머무를 거처도 없었던 조오련은 생계를 위하여 수영장 근처 간판 가게에서 일했고 수영장 청소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온종일 수영 연습에만 매진했다. 가끔식 시골에서 왔다고 시비를 걸거나 연습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조오련은 절대 기죽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조오련은 항상 수영장에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연습을 이어갔다. 이런 조오련을 눈여겨보던 당시 오산고 1학년이자 수영부 소속이던 박석기씨와 절친이 되면서, 친구의 배려로 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수영장 회원으로 '장 선생님'으로 불리던 장형숙씨는 과거 수영부 경력을 지닌 인물로 조오련에게 처음으로 수영의 기본기를 알려준 은사였다. 장 선생은 수영에 혼신을 다하는 조오련에게 흥미를 느끼고 그의 개인코치이자 후원자가 되어주기로 결정한다.

당시만 해도 한국 수영의 수준은 기술의 종류나 필요성조자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은사였던 장 선생은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당시로서 국내에서 선구적이었던 '턴 기술'을 집중 연마시켰다.

수영에 대한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던 조오련도 매일같이 꾸준한 반복 연습을 통하여 기량을 성장시켜 나갔다. 조오련의 주변인들은 그가 엄청난 연습벌레였다고 회상한다. 수영 후배인 이관웅씨는 "조오련은 연습량이 너무 많았고. 다른 사람들이 1년간 했던 걸 자신 한 달 만에 해본다든가. 이런 정도의 악과 근성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수영 천재'로 이름 떨친 조오련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1969년 6월, 조오련에게 일생일대의 첫 기회가 찾아온다. '전국체전'이 열리며 당시 학교 소속이 없던 조오련은 성인들이 뛰는 '일반부' 소속으로 경기에 출전했다. 놀랍게도 18세의 조오련은 남대부 자유형 1500미터에 출전, 21분 18초로 대회 신기록을 수립하여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뤄낸다.

마침 이 경기를 지켜본 대한체육회 회장은 조오련의 기량에 감탄하며 그를 당장 태릉 선수촌에 입촌시킬 것을 지시했다. 마침 태릉선수촌에 수영장이 막 만들어지던 시기라 조오련에게는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기적의 연속이었다. 또한 조오련은 수영 명문인 양정고에 입학허가가 나면서 학업도 다시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조오련은 쟁쟁한 선수들이 모이는 태릉선수촌에서도 독기와 승부욕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조오련은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을 휩쓸었고 한 해에만 무려 11번의 한국 신기록을 경신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수영 천재'로 이름을 떨쳤다.

수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 된 시점에, 조오련은 당당히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태극마크까지 달게 된다. 1970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조오련은 당시 아시아 수영 최강국이던 일본 선수들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조오련은 한일전에 강한 의욕을 드러내며 코치들에게 "내가 지쳐 자빠지면, 물에서 건져나 달라"고 할 만큼 독기를 품었다고 한다.

조오련은 국가대표 첫 무대였던 자유형 400미터에서 일본 선수를 무려 1초 앞지르고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대한민국 수영 역사상 첫 금메달이었다. 이어 조오련은 남자 자유형 1500미터에서 17분 25초 7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 우리나라 최초의 수영 2관왕에 등극하는 쾌거를 이루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에 돌아온 조오련은 엄청난 국민적인 환영을 받았다. 헹가래에 도심 카퍼레이드까지 펼쳐지며 스포츠계를 뒤흔든 수영 영웅의 등장을 반겼다. 이때부터 조오련은 '국민 영웅', '국민 남동생' 등과 함께 그의 대표적인 별명이 되는 '아시아의 물개'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또한 조오련의 등장으로 한국에서는 본격적인 수영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전국에 수영장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하고, 수영을 배우겠단 강습생도 엄청 증가한다. 많은 스포츠 유망주들이 조오련을 통하여 '수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되는 시작이었다. 훗날 대한민국 수영 국가대표 감독이 되는 노민상씨 역시 조오련을 보면서 수영인의 꿈을 키우게 된 대표적인 '조오련 키즈'였다.

노민상을 비롯한 후배들이 특히 동경했던 것은 조오련의 강한 정신력이었다. 조오련이 직접 작성한 수기에 따르면, 그는 "건방진 말인지 몰라도 적어도 남을 이기려면 남모르는 고통을 통한 무단의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방콕에 와서도 복싱 선수들이 6시부터 시작하는 로드 워킹을 기다려 함께 뛰었다. '이 시간에는 일본 선수들이 잠자고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러나 나는 뛴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남다른 성공비결을 서술하고 있다.

조오련은 4년 뒤에 열린 1974년 테헤란에 아시안게임에서도 또다시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2연패에 성공했다. 당시 23세의 조오련은 시상대에 오르면서 트레이닝복 대신 미리 준비한 흰 모시옷과 고무신, 태극 머리띠를 두르고 '한복차림'으로 등장하는 깜짝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한국 국민들에게 또 한번 자부심과 감동을 선사했다.

이후 조오련은 4년 뒤인 1978년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하여 3연패에 도전했지만, 접영 200미터에서 동메달을 추가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당시 조오련의 나이는 27세로 이때만 해도 20대 후반이면 수영 선수로서 전성기가 지났다고 이야기하던 시대였다. 결국 이 대회를 끝으로, 조오련은 사실상 선수 생활을 은퇴하게 된다.

하지만 조오련의 진정한 이야기는 이때부터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조오련은 어느날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너겠다'는 도전을 선언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다.

대한해협은, 대한민국과 일본 규슈지방 사이의 바다를 뜻한다. 일본까지의 최단 거리는 부산 태종대에서 대마도 북단 사오자키 등대까지 직선거리로 약 48km지만, 수영으로 횡단한다면 해류까지 감안할 때 60km에 이르며 이는 마라톤 풀코스를 한참 뛰어넘는 거리였다. 시속 3km 정도로 간대도, 20시간을 헤엄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조오련은 평소에도 수영 지인들과 함께 종종 바다수영을 즐기면서도 지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조오련이 만일 수영으로 횡단에 성공한다면, '대한해협을 건넌 최초의 인류'로 남는 것이었고, 그가 무모한 도전을 결심한 이유였다.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만류했지만, 선배 지봉규씨만은 "아시아의 물개인 조오련이라면 할 수 있다"고 믿어줬고, 대한해협 횡단 감독을 맡아서 조오련을 돕기로 한다.

조오련은 대한해협 횡단을 준비하면서 장거리 도보행군과 잠 안 자고 버티기 등 엄청난 지옥 훈련을 소화했다. 또한 바다 적응 훈련을 통하여 장거리 연습부터 캄캄한 야간 수영 적응훈련을 거쳤다. 지봉규 감독 역시 조오련의 안전을 위하여 현지의 다양한 해상 돌발상황 등을 가정하고 치밀하게 준비했다.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넌 최초의 인류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1980년 8월 11일 자정. 8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디데이가 돌아왔다. 하얀 모자와 수영복을 입은 조오련이 나타나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정확히 00시 5분. 사람들의 응원을 뒤로한 채 조오련은 힘차게 물을 가르며 다대포항을 출발했다.

조오련은 무려 13시간 넘게 맨몸으로 수영을 계속하며 바다를 질주했다. 이동하는 물 위에서 따뜻한 죽과 물로 식사를 해결했다. 중간에는 해파리떼의 공격을 받거나 멀미를 일으키기도 하고, 장거리 수영으로 인하여 환각증세까지 일으키는 등 여러 번 고비를 맞이했다.

하지만 조오련은 불굴의 의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목적지인 대마도 등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조오련은 안전망을 벗어나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여 홀로 헤엄쳐서 등대 앞에 도착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재일 동포들은 조오련이 등장하자 일제히 환호하며 꽃다발을 건넸다.

조오련은 결국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넌 최초의 인류에 등극했다. 조오련이 남긴 최종 기록은 13시간 16분 10초. 이는 예상했던 기록을 6시간이나 앞당긴 것으로 그만큼 조오련이 얼마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물살을 갈랐는지 짐작케한다.

조오련은 도전에 성공한 직후, "내가 수영을 끊임없이 하는 진짜 이유는, 나를 이기는 힘. 있는 힘을 끝까지 다 써서 마지막에서 뭍으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때 쾌감을 자꾸만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이라고 끝없는 도전의 이유를 밝혔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한국영화 <친구>에는 조오련과 관련한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둘이 헤엄치기 시합하면 누가 이길 것 같노?" 그만큼 조오련이란 이름은 이제 '수영' 하면 떠오르는 고유대명사이자 전설이 됐다.

이후 조오련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오랜 꿈이던 수영 교실도 열었다. 힘들었던 시절은 추억으로 남겨놓고 평온한 삶을 즐기기만 하면 충분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오련은 대한해협 횡단에 성공한 지 20년이 자닌 49세의 나이 다시 바다에 나타난다. 지난 2000년 방영됐던, SBS 예능 <뷰티풀 라이프>의 '대한해협 횡단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당시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 한국과 일본을 이어줄 초대형 이벤트로 기획되며 배우 소지섭과 이훈, 걸그룹 베이비복스 등이 출연했다.

20년 전과 다른 점은, 이번에는 조오련 혼자서가 아닌 여러 사람이 릴레이로 대한해협을 건너는 프로젝트였다. 조오련은 어느덧 반백살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수영 실력이 부족한 연예인 팀원들을 직접 혹독하게 교육시키며 두 번째 도전을 준비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2000년 8월 12일, 대한해협 횡단팀의 두 번째 도전이 시작됐다. 조오련을 시작으로 17명의 횡단팀은 이번에도 여러 차례의 어려움을 극복한 끝에 75km 거리의 대한해협을 완주하는 데 성공한다. 총 완주 시간은 18시간 11분이었다.

여정이 성공으로 마무리되는 순간, 팀원들은 다들 바다에 함께 뛰어들고 만세를 부르며 얼싸 안았다. 당시 연예인 팀장으로 함께 참여했던 배우 이훈씨는 "대마도 땅을 밟을 때 지금 생각해도 짜릿한 성취감이 느껴질 정도로 행복했다"고 회고했다.무엇보다 20년 전에는 조오련이 홀로 싸워온 길을, 이번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겨냈다는 데 더 값진 의미가 있었다.

조오련의 도전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2005년에는 일명 '물개가족 독도 횡단' 프로젝트를 통하여 두 아들과 함께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120km를 헤엄치는 이벤트로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3년 후엔, 민족대표 33인을 기리기 위하여 7월 한 달간 독도를 33바퀴 도는 도전에도 성공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무려 56세였다.

그리고 2009년 환갑을 앞둔 나이에. 조오련은 약 30년 만에 또다시 대한해협을 건너겠다는 도전을 선언한다. 주변에서 조오련의 나이를 걱정하며 만류했지만, 조오련은 "힘든 게 걱정이겠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온몸을 내던져야제"라며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오련의 마지막 도전은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한창 바다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조오련은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고 결국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별은 국민들과 동료들에게도 모두 충격을 안겼다.

"바다를 사랑한 만큼, 바다가 저한테 사랑을 주더라고요. 언제가 제일 좋냐 그러면, 전 배는 좀 나왔지만 수영복 입을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조오련이 생전에 남긴 인터뷰에서 그의 남다른 바다사랑을 엿볼 수 있다. 조오련은 수영 선수로서 얻은 명성만으로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2020년, 조오련은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으로 선정됐고, 체육인으로서 6번째로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며 국가적 예우를 받았다.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시작하는 순간 도전이 된다'. 모교 양정고에 설립된 기념비에 남겨진 조오련의 어록이다. 조오련은 왜 그토록 힘든 길을 감수하면서도 평생 극한의 도전을 계속 멈추지 않았을까. 주변인들은 조오련이 새로운 도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계속 희망을 전하려 하는 거 같았다고 회고했다. 조오련에게 도전이란 그 자체로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귀중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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