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란의 쇼미더컬처] 어느 ‘무명’ 화가의 고려대박물관 전시
누구나 자기 인생에선 주인공이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진리를 곱씹게 된 건 엊그제 고려대박물관 기획전시실을 둘러보면서다. 오는 30일까지 열리는 ‘달맞이꽃의 작가 이규호 화백 회고전’은 이규호(1920~2013)씨의 유족이 그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마련한 전시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무명’으로 치부하는 건 결례지만, 이씨가 우리 미술 교과서에 이름을 남기거나 억 소리 나는 경매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지 않는 ‘평범한’ 화가임엔 분명하다. 그런 전시에 굳이 발품을 판 건 더중앙플러스에 기자가 연재하는 ‘더 헤리티지’에서 그를 다룬 적 있어서다. 실은 기사에서 이씨는 조연이었고 한국 조각계가 낳은 비운의 천재 권진규(1922~1973)가 주연이었다.
이씨는 1962년 8월 31일부터 1977년 3월 12일까지 고려대박물관 학예직(서기)으로 근무하면서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전시실을 여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평가가 무르익지 않았을 무렵, 적극적으로 학교와 화단(畫壇)을 매개하면서 초기 수작들을 대거 박물관에 귀속시켰다. 지난해 현대미술전시실 개관 50주년 특별전 당시 관람객들을 놀라게 만든 박수근·이중섭·김환기·장욱진·천경자 등 호화 컬렉션이 그 덕에 가능했다. 기사에서 권진규의 대표작 ‘마두’ ‘자소상’ ‘비구니’가 고려대박물관에 모이기까지 사연을 전하면서, 이씨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 같은 존재라고 비유한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말하자면 테오 반 고흐가 남긴 유작들을 보러 간 거였는데, 전시실을 둘러볼수록 겸허해졌다. 대략 1978년부터 달과 달맞이꽃을 소재로 파고들기 시작한 그의 화업은 구상에서 반구상으로, 향토색 서정에서 원색의 화려함으로 시대와 함께 변주했다. 약 90점에 이르는 작품 속 이씨는 빈센트도 테오도 아니었고, 권진규를 발굴한 박물관 학예사도 아닌, 화가 이규호였다. 그의 작품에 예술성·상품성을 논할 재간은 없지만, 그가 자신의 삶을 성실·우직하게 살았단 건 알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고려대에서 사후 회고전을 열어주고 싶다는 유족의 뜻을 박물관 측이 수용하면서 성사됐다. 지난해 50주년 특별전을 통해 이씨의 공헌이 재조명된 측면도 크다. 이씨의 아들 이종훈씨는 기자에게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미술관(박물관)이 드물던 시절, 좋은 작품이 사라지지 않고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게 한 아버지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한다”면서 “누군가의 헌신이 바탕이 돼 교육과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단 걸 학생들이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 고려대 전시를 추진했다”고 말했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이름이 없는 게 아니듯, 이름 없는 역할을 묵묵히 해내는 사회 곳곳 ‘조연’들이 많다. 조연이 잘해야 주연이 산다. 그런데 조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니 아예 새로운 드라마가 가능하단 걸, 모처럼 되새겨보았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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