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적 사고’와 ‘승리적 관점’ 너머 [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한겨레 2024. 6. 13.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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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에 물이 반밖에 없군." 부정적 사고다.

'원영적 사고'는 부정적인 걸 전부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인식하되 그조차 긍정적 결과로 가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의지적 낙관', '승리적 관점'에는 '원영적 사고'와 다른 게 하나 있다.

'원영적 사고'의 주체는 나라는 개인인 반면, '의지적 낙관'과 '승리적 관점'의 주체는 집단이거나 공동체 속의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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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15일 엑스(X·옛 트위터)에 올라온 ‘원영적 사고’ 유행의 시작이 된 게시물. 엑스 갈무리

박권일 | 독립연구자·‘한국의 능력주의’ 저자

“컵에 물이 반밖에 없군.” 부정적 사고다. “컵에 물이 반이나 있네.” 이건 긍정적 사고다. 한편 ‘원영적 사고’는 이렇다. “내가 연습 끝나고 딱 물을 먹으려고 했는데 글쎄 물이 딱 반 정도 남은 거양!! 다 먹기엔 너무 많고 덜 먹기엔 너무 적고 그래서 딱 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럭키비키잔앙!”

걸그룹 멤버 장원영씨에게서 비롯한 이 인터넷 밈은,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결국 좋게 작용할 거라는 초긍정적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원영적 사고’는 부정적인 걸 전부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을 인식하되 그조차 긍정적 결과로 가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그냥 ‘정신승리’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논문 쓰느라 매일이 우울한 와중 ‘원영적 사고’는 꽤 도움이 되었다. “노안이 시작돼 글을 오래 읽기 어렵지만 몇년 후에 써야 했다면 무조건 돋보기안경이 필요했을 거야. 안경 없이 이 정도 보이는 게 어디야, 완전 럭키비키잔앙!”

그런데 ‘원영적 사고’의 의미를 알게 되자마자 의식의 흐름처럼 떠오른 말들이 있었다. ‘의지적 낙관’과 ‘승리적 관점’이다. 이른바 ‘운동권’에게 참 익숙한 말인데, 맥락을 알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예컨대 이런 스토리. 19××년, 대학 신입생 홍길동은 정신을 차려보니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불의한 정권에 분노하며 열심히 데모를 나가고 이론 학습에 매진한다. 3학년이 되자 조직에서 직함도 생겼다. 하지만 그에겐 말 못 할 고민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왜 정권은 건재하고 여론도 우리 편으로 돌아서지 않지?’ 어느 날 길동은 평소 따르던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울분을 쏟아낸다. “선배! 지금까지 싸운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 세상은 점점 나빠지는데 말이에요.” 선배는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크게 두가지 버전이 있다. “길동아, 그람시는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고 했어.(이하 생략)” “길동아, 승리적 관점으로 봐야지. 이 상황이 오히려 좋을 수 있다?(이하 생략)”

그런데 ‘의지적 낙관’, ‘승리적 관점’에는 ‘원영적 사고’와 다른 게 하나 있다. ‘원영적 사고’의 주체는 나라는 개인인 반면, ‘의지적 낙관’과 ‘승리적 관점’의 주체는 집단이거나 공동체 속의 나이다. 물론 “집단적 정신승리에 빠져 있을 뿐”이라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이 개인적 희망을 넘어 공적 희망을 추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오늘날 개인적 희망과 공적 희망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여기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본다.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희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개인적으로 잘 풀리리라 믿는다. … 그렇지만 일본인 대다수는 공적인 희망을 품지 않는다. 자국의 미래나 세계의 미래에 관해 일본인들은 태연히 절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연 파괴는 결국 멈추지 않을 것이고, 자국의 정부를 움직이는 뿌리 깊은 정치 파벌을 대중이 통제할 날이 올 리 없으며, 미래의 기술 지배 사회에서는 자유를 잃을 수밖에 없다고, 막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래디컬 데모크라시’, 354쪽)

한국인은 얼마나 다를까? 적어도 나는 저 일본인들과 무척 닮았다. 탈화석연료 시대에 20% 확률의 석유를 시추하겠다는 윤석열 대통령, 무력해진 종부세를 바로잡기는커녕 아예 1주택자를 면제하겠다는 거대 야당 민주당, 이들의 폭주를 견제할 독자적 진보정당의 부재에 절망하고 있는 까닭이다. 요즘 사석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이는 논쟁이나 갈등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정치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거의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이 마뜩하지 않아 하루빨리 공적 희망을 회복하고 싶지만, 동시에 ‘의지적 낙관’이나 ‘승리적 관점’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잘 안다. ‘관점의 긍정적 전환’ 같은 것에서 도출된 희망은 새로운 관점이나 단 하나의 반증 앞에 맥없이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단단한 공적 희망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무척 연약해 보이는 어떤 믿음에서 출현한다. 러미스는 이를 ‘민주주의 신앙’이라 불렀다. 그 신앙은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인 타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뢰하겠다는 역설적 결단이다. 공적 희망은 이런 믿음을 통해서야 개인적 희망과 연결되며, 그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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