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죽은 후,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박은영 기자]
눈치 빠르고 싹싹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갈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걸. 아내가 없으니까... 하루가 기네요.
<동경 이야기> 중
드디어 이 영화의 차례가 오고 말았다. 영화 좀 본다는 내 주변 사람들이 입모아 인생 영화라 말하는 오스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 이야기>. 영화의 존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이 영화를 안 보고 있었다. 1953년 일본에서 제작된 데다 `오노미치`에 사는 부부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1953년은 일본이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시대다. 영화 속 배경인 오노미치는 원자 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시에서 불과 80여킬로 떨어져 있는 곳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어느 정도 감이 오지 않는가?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8월이 가까워지면 일본 텔레비전에는 유독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참회의 눈물이 아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흘리는 눈물이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슬플까. 그렇겠지. 나 역시 그들의 고통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동시에 "그러니까 전쟁을 일으키지 말았어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잘못했습니다." 없는 "나도 아팠어"는 듣는 이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실효성 없는 반전 운동의 구호만이 들려오는 일본의 8월. 15년째 일본에 사는 나에게는 곧 있을 장맛비만큼이나 불쾌한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경 이야기>를 보기로 용기를 낸 것은 의외의 계기에서다. 영화 속에는 나도 알만한 동경의 명소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70년 전 동경 시내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호기심이 불편함을 이겼다.
▲ 영화 <동경 이야기>의 포스터 |
ⓒ 오드 AUD |
영화는 오노미치에 사는 노부부 슈우키치(류 치수)와 토미(히가시야마 치에코)가 동경에 있는 자식들을 만나러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큰 아들 코우이치(야마무라 소우)는 동경 변두리에서 작은 소아과를 운영하고 있다. 밀려오는 환자들에 시달리는 아들 내외는 부모의 방문을 반기지 않는 눈치다. 일요일이 되면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던 아들은 환자를 핑계로 계획을 취소해 버린다.
노부부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딸 시게(스기무라 하루코)의 집으로 옮겨 간다. 그러나 시게 역시 바쁘다는 이유로 올케인 노리코(하라 세츠코)에게 부모를 떠넘긴다. 전쟁에서 죽은 셋째 아들의 아내인 노리코는 직장 생활을 하며 허름한 공동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녀는 휴가를 받아 시부모에게 도쿄 시내 구경을 시켜준다.
▲ 며느리 노리코는 시부모를 정성껏 대접한다. |
ⓒ 오드 AUD |
장례식이 끝나고, 자식들은 기다렸다는 듯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며느리 노리코만이 남아 시아버지를 보살핀다. 며칠 후 노리코가 동경으로 돌아가는 날. 슈우키치는 "내 자식들보다 타인인 네가 더 잘해줘서 고맙다"라고 말하며 부인이 아끼던 시계를 며느리에게 건넨다.
▲ <동경 이야기> 속 가족의 모습 |
ⓒ 오드 AUD |
그렇다. 이것은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역시나 `전쟁`이었다. 다만 영화가 전쟁을 기억해 내는 방식은 8월의 일본 텔레비전처럼 불쾌하지 않다.
비결은 오스 야스지로의 연출에 있다. 감정은 빼고, 풍경을 바라보듯 그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영화 속 카메라는 없는 척 시치미 뚝 떼고 구석에 앉아, 사람들의 모습을 담담히 담아낸다. 영화 속 노부부는 자신들을 귀찮아하는 자녀들이 못마땅하면서도 "그래도 우리는 행복한 인생"이라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 말 뒤에는 "그래도 살아남은 자식들이 있으니까. 우리 또한 살아있으니까" 라는 말이 숨겨져 있다.
전사한 셋째 아들의 부인 노리코는 남편을 잊어가는 스스로를 "약아빠진 여자"라고 비하한다. 그녀는 남편을 잊는 것이 두렵다. 노리코는 속죄라도 하듯 극진하게 시부모를 보살핀다. 시부모는 남편과 자신을 잇는 유일한 끈이기 때문이다.
슈우키치가 고향 친구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신다. 술이 들어가니 진짜 마음이 나온다. 온통 전쟁 이야기다.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친구는 슈우키치에게 "네가 제일 부럽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듯 "유쾌하다! 유쾌하다!"를 연발하며 기억을 지우기 위해 술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 "아름다운 새벽이었어" 남겨진 슈우키치는 말한다. |
ⓒ 오드 AUD |
1953년이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내는 그래도 70년 가까이 살았다. 자식들, 손자들의 얼굴도 보고 그 좋다는 동경 구경도 했다. 행복한 인생이었다.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죽음이 있었다. 그중에는 꽃도 못 피고 사그라진 목숨들도 있었다. 그래서 슈우키치는 아내가 죽은 날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이 아름답고, 삶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엄마 왜 울어?" 영화가 끝날 때쯤 방에 들어온 아이가 묻는다. 나도 모르게 눈물 한 가닥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씨구, 나 영화 보고 우는 사람 아닌데? 화면 분석하느라 내용에 몰입 못하는 직업병 있는데? 그런 내가 영화를 보고 운 건 15년 만의 일이었다. (나를 울린 마지막 영화는 애니메이션 <업(2009)>이다.)
큰 소리로 오열하는 장면 없이도 모든 관객을 울리는 영화. 가족을 가진 누구나가 공감할 이야기. 잔뜩 경계하고 보기 시작한 영화지만 오랜만에 짙은 여운을 주는 영화를 만났다. 인정하자. 가끔은 세상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는 것이 진짜일 때도 있다. 영화 <동경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런 분께 추천해요!
#잔잔한 영화 좋아하는 편 #일본 영화도 편견 없이 보는 편 #이 영화가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이유가 궁금하시다면?
덧붙이는 글 | <동경 이야기>는 로튼 토마토 <최고의 영화 100선> 75위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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