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아신극장’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걸요?” [공간을 기억하다]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대전 대흥동 문화거리, 아날로그한 풍경 속의 아신극장
옥황상제께 죄를 지어 하늘에서 쫓겨난 사당패들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야만 다시 하늘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갈고 닦는 재주는 남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연극 ‘남사당의 하늘’의 내용이다. 광대 즉 예술가란 무엇을 위한 존재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던지는 이 작품처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재능으론 남을 감동시킬 수 없고, 신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의지를 담은 소극장 아신(我神)극장이 2013년 대전 중구 대흥동 건물에 들어섰다.
대흥동 일대는 ‘문화거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젊은 층이 선호하는 지역이다. 세련된 느낌의 건물과 카페가 새롭게 들어서고, 70~80년대의 향수를 떠오르게 하는 옛 풍경도 함께 어우러진다. 사실 둔산동으로 공공기관이 이전하는 등 대전에 새로운 도시가 부상하면서 쇠락하고 있는 동네라는 인식도 있지만, 그 덕에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독특한 풍경이 연출됐다.
당초 가톨릭문화회관 건물을 임대하면서 시작해 인근 건물에 다시 자리잡은 아신극장도 아날로그적 감성을 지키고 있는 풍경들 중 하나다. 아신극장은 중앙로역에서 으능정이문화의거리, 대흥동문화예술거리의 끄트머리에 있는 오래된 건물 2,3층를 극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20~30대가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많고, 교통도 편리하다 보니 젊은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하다.
“꿈이었던 소극장 운영, ‘예술놀이터’이자 ‘문화자산’ 역할”
아신극장 이인복 대표는 연극영화학 연출 전공으로 1993년부터 전문극단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그러다 극단의 기획실장을 맡아 운영에 참여하면서 ‘돈 걱정 없이 연극하는 방법은 없을까’ ‘어떻게 하면 기획·마케팅을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종합광고대행사를 설립하고, 사업을 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며 꽤 좋은 수익을 얻었지만, 연극을 하기 위해 했던 고민에서 정작 ‘연극이 뒷전’이 되어 버린 상황을 겪었다.
“다시 ‘돈을 벌어 연극판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사기를 당하면서 하루아침에 사업이 모두 부도 처리됐습니다. 돈 벌어서 연극판으로 가겠다는 약속은 사라지고, 7년 만에 빈털터리로 연극계로 돌아오게 된 거죠. 아무런 대책도 없었고, 막막한 상태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닫혀있는 가톨릭문화회관 아트홀을 보게 됐고, 무작정 임대해달라고 설득했어요. 후불을 조건으로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결국 설득했고, 극장 문을 열었습니다.”
사실 소극장의 꿈을 가진 건 고등학생 시절, 연극 시작하던 시절부터였다. 조금 돌아오는 동안 ‘낭만적인 꿈’은 금전적 절실함에서 오는 선택이었다. 이 대표는 공연 제작비 한 푼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투자를 받아 공연을 진행했고, 처참한 결과를 맞았지만 포기하기 않고 공연을 올리면서 모든 투자금을 반환했다.
“지역에서 소위 상설공연을 하는 극장이 몇 개 없습니다. 도시별 1~2개 정도죠. 처음 극장을 운영하면서부터 아무리 힘들도 월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공연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식당을 갈 때 ‘오늘 또 문닫았네’하면 다음엔 찾지 않는 것처럼 아신극장은 언제나 열려있는 곳이길 바랐고, 어느 정도 그 문화를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2013년 개관 이후 52만명의 관객이 다녀갔습니다. 대전에서 연극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도 ‘아신극장’은 다 아는 그런 소극장이 됐죠. 아신극장이라는 이름만 믿고 공연을 선택해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대표의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바탕으로 쌓인 관객들의 신뢰는 새로운 것들을 제작하고 실험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이 대표는 척박한 대전 지역의 공연 시장에서 다양성을 위한 실험을 이어가겠다는 각오다.
“지역 소극장은 그 지역주민의 예술놀이터이자, 예술을 향유하는 공간이며, 공연시장을 개척 및 확장해 나갈 수 있는 지역의 중요한 문화자산입니다. 문화와 예술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다양성과 지속성입니다. 민간 소극장은 생존하기 위해 계속 진화하고 실험하면서 다양한 것을 생산해내죠. 지역이라는 핸디캡이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합니다. 창작 인큐베이팅을 하기에는 최적의 거점이거든요. 지역에서 개발된 작품(대본, 음악)을 해외로 수출하는데 올해부터 주력하고 있습니 다. 빠르면 내년에 아신극장에서 공연되었던 작품을 영국, 중국에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대표가 척박한 시장에서 더 단단해질 수 있었던 건 ‘연대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 광주, 대구 등 상설극장을 운영하는 다른 지역의 극장을 찾아가 함께 공부했다. 자신보다 먼저 극장을 운영한 다른 지역의 선배 극장주들에게서 ‘극장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꾸준함으로 이겨낸 덕에 지금의 아신극장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셈이다.
“극장을 오래 운영하다 보니 재미있는 일도 많습니다. 청소년 시절 가톨릭문화회관, 아신극장에서 연극, 뮤지컬을 관람했던 학생들이 이제 성인이 되어 관객으로 다시 찾아오기도 하고, 배우로 무대에 오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오디션 때 본인이 고등학교 시절 가톨릭문화회관에서 뮤지컬을 보고 배우의 꿈을 키웠다고 하더군요. 기분이 묘했습니다.”
이 대표가 아신극장을 통해 꾸는 꿈은 ‘돈을 버는 것’이다. 누군가는 부정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돈’이 단순히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의도의 물질적 욕심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소극장 운영에 뛰어들었다는 이 대표는 “누구나 하는 방식으로 쉽게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철학과 고민이 담긴 작품으로 꾸준히 연구하고 분석해서 ‘제대로’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한다.
“모든 예술인의 꿈일 것 같습니다. 화가는 그림을 그려서 먹고 살길 원하고, 연극인은 공연으로 티켓을 팔아 먹고 사는 세상을 원하죠. 취미는 취미로써, 전업 예술은 직업으로써 보호받고 존중받는 사회가 구현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가끔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거상을 지향하는 장사꾼’이라고 말합니다. 소극장을 하면서 저 혼자만 먹고 살고자 하면 어떻게든 가능하죠. 그러나 전 공연시장을 키우고 싶습니다. ‘돈이 안 돼서 공연장을 떠나겠다’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줄어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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