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규 "A매치 골까지 34년...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죠"
"이 한 골을 넣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버티고 또 버텼나 봅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감격을 첫 골을 터뜨린 주민규(34·울산 HD)는 활짝 웃었다. 그는 지난 6일 열린 싱가포르와의 북중미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5차전 원정경기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선발 출전해 1골 3도움을 몰아치며 한국이 7-0으로 이기는 데 앞장섰다. 지난 3월 태국전에서 '만 33세 343일'의 나이로 역대 한국 최고령 A매치 데뷔 신기록 작성했던 주민규는 세 번째 출전이었던 싱가포르를 상대로 '34세 54일'의 나이로 A매치 데뷔골을 맛봤다. 한국 축구 최고령 A매치 데뷔골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는 지난 11일 중국과의 아시아 2차 예선 최종경기에선 결승골에 힘을 보탰다. 후반 16분 교체로 그라운드를 밟은 뒤 페널티박스를 파고들자, 그에게 중국 수비수들이 몰렸다. 그 덕분에 2선 공격 이강인(파리생제르맹)에게 슈팅 찬스가 열렸다. 주민규를 중국전 이튿날인 지난 12일 서울 송파구의 굿대디스포츠클럽에서 만났다. 그는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한 덕분에 부담감은 사라지고 대신 여유가 생겼다. 프로 데뷔 후 지금까지 넣은 골 중 가장 값지다"라고 말했다. 주민규는 K리그에서만 138골을 기록 중이다. 이동국(228골), 데얀(198골·이상 은퇴)에 이어 통산 최다골 3위에 올라있다.
주민규는 A매치 데뷔골을 넣은 뒤 양손을 귀에 갖다 대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그는 "대표팀 경기에서 팬들이 '주민규'를 외쳐주기까지 무려 34년이나 걸렸다. 팬들의 환호를 더 크게, 더 오래 그리고 더 소중하게 듣겠다는 의미의 세리머니다. 앞으로 더 자주 선보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팬들은 주민규에게 '주리 케인'이라고 부른다. 주민규와 잉글랜드의 간판 스트라이커 해리 케인(31·바이에른 뮌헨)을 합친 말이다.
케인은 지난 시즌까지 토트넘에서 손흥민(32·토트넘)과 콤비를 이루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최고의 듀오로 불렸다. 한국에선 '손-케 콤비'라고 불렸다. 싱가포르전에서 손흥민의 골을 어시스트한 주민규의 플레이는 케인과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민규는 "(손)흥민이와 뛰면 오래 전부터 호흡을 맞춘 것처럼 자연스러운 플레이가 나온다. 주리 케인이란 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주민규가 국가대표 공격수가 되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다. 가장 밑바닥인 연습생으로 시작해 축구 선수로는 최고 무대인 대표팀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한양대를 졸업한 주민규는 2013년 참가한 K리그 드래프트 참가했다. 하지만 지명을 받지 못하면서 연습생으로 당시 2부 리그 팀 고양HiFC(해체)에 입단했다. 당시 연봉은 2000만원에 불과했지만, 처우나 팀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주민규는 살아남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팀 훈련 후 발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슈팅 훈련을 했고, 거친 몸싸움을 버텨내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2015년 2부 창단 팀 서울 이랜드FC로 이적하면서 포지션도 미드필더에서 공격수로 바꿨다. 주민규는 "연습생 때 월급이 100만원도 안 됐고, 이랜드에선 평생 뛴 포지션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땐 슬퍼하는 것도 사치다. 프로에선 살아남는 것이 곧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탄탄한 체격(1m83㎝·82㎏)에 정교한 킥 능력을 앞세운 그는 이랜드 입단 첫 시즌에 23골을 터뜨리며 2부리그를 평정했다. 2019년엔 울산 유니폼을 입고 꿈에 그리던 1부 무대를 밟았다. 주전 경쟁에서 밀려 2020년 제주 유나이티드로 이적했지만, 이듬해 22골을 터뜨리며 생애 첫 1부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2023년 다시 울산으로 이적한 그는 같은 해 또다시 득점왕(17골)에 오르며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전성기를 이어갔다.
마지막 꿈이었던 태극마크의 꿈은 지난 3월 당시 대표팀을 이끌었던 황선홍(56) 임시 감독의 부름을 받으며 이뤄졌다. 주민규는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면서 사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는데, 끝까지 해낸 덕분에 지금 웃는 것 같다. 연습생, K리거들 그리고 나이가 많아 도전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처지가 비슷했던 저 사람도 해내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민규는 2026 북중미월드컵이 개막할 때면 36살이 된다. 그는 "팬들이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라는 걸개를 만들어 응원해주셨다. 나이가 더 많아질수록 세울 기록들도 생기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 늦었지만, 활짝 폈으니 다음 A매치만 보고 열심히 달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골을 넣을 수만 있다면 머리, 발, 배, 엉덩이 등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겠다. 최대한 오래 버티겠다.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서른넷 주민규의 컨디션이 굉장히 좋다'는 것뿐"이라며 웃었다.
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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