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디 단 디저트에는 어떤 와인이 좋을까?

임승수 2024. 6. 1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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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이 음식을 만나는 순간] 와인-음식 페어링 10원칙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임승수 기자]

와인과 피아노. 두 취미에 대해서 언론사에 글을 연재했다. 댓글 반응은 대서(大暑)와 대한(大寒)의 온도 차이만큼이나 달랐다. 피아노 글에는 응원하는 댓글이 달렸지만, 와인 글에는 악플이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열렸다. 시국이 어수선한데 무슨 와인이냐, 막걸리에 소주나 마시지 무슨 와인이냐, 마르크스주의 책을 쓴 사람이 무슨 와인이냐 등등.

피아노 연주는 뭔가 고상하고 예술적인 취미지만,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는 건 그저 본능적이고 세속적인 일로 여기는 듯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습하는 마음가짐과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을 고민하는 마음가짐이 크게 다르지 않은 나로서는, 둘 모두를 진지한 행위로 여기는 나로서는,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온도 차이였다. 피아노 연주는 무죄, 와인 음용은 유죄라는 이 편파적 구형에 맞서 소심하게나마 변론을 해보고 싶어졌다.

미각은 중요한 생존 메커니즘

일단 미각이라는 녀석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진화론에서는 생명체의 생존과 번식 확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미각이 발전했다고 본다. 생명체 대부분은 외부로부터 음식을 섭취해 에너지를 얻는데, 미각은 유익한 음식을 선택하고 유해한 음식을 가려내어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생존 메커니즘이다.

가령 어떤 종(種)이 치명적인 독극물에서 극상의 맛을 느낀다고 하자. 맛있다고 청산가리 같은 걸 마구 먹어대다 보면 얼마 못 가서 사망할 테고 그 종은 필연적으로 멸종한다. 자기 몸에 좋은 음식물을 섭취했을 때 맛있다고 느끼는 생명체가 생존 및 번식 확률이 올라가는 건 당연지사다. 청각 또한 개체의 생존과 번식 확률을 높여주는 센서로 진화해 왔다는 점에서, 미각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진화적 압력 속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내며 생존한 종은 제법 성능이 뛰어난 미각 센서와 청각 센서를 장착하게 된다.

그런데 생산력이 발전하고 사회가 풍요로워질수록 인간이 센서를 활용하는 방식에 근본적 변화가 발생한다. 단순히 생존 확률을 높여주는 역할을 했던 센서의 신호를 좀 더 적극적으로 탐닉하고 향유하게 된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문명에서 발견되는 다채로운 요리와 음악은 그러한 경향성을 여실히 증명한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생존과 번식에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인간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요리 실력을 연마하고 더욱 맛있는 요리를 개발한다. 거대한 교향곡을 작곡하고 평생을 갈고 닦은 악기 실력으로 그 곡을 연주하며 수많은 사람이 일부러 시간을 내 초집중 상태로 감상한다.

현재 인류가 누리는 문화는 생존의 '수단'이자 진화의 '부산물'에 불과했던 감각이 어느덧 삶의 '목적'으로 격상되었다는 증거다. 우리는 그러한 목적의식적 활동의 결과물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피아노를 연습하며 감동적인 소리를 추구하면 멋있다고 하지만,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을 시도하며 감동적인 맛을 추구하면 염병한다고 한다. 왜 청각만 존대하고 미각은 천대하는가. 심지어 음악은 안 들어도 살 수 있지만 음식은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데도. 어쩌면 생존 그 자체와 가장 긴밀하게 엮인 감각이라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억한 마음에 푸념을 늘어놓기는 했으나, 예술로 인정받느냐와는 별개로 수많은 사람이 와인과 음식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미각적 성과물에 매료된다. 마치 임윤찬 피아니스트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에 매료되듯이. 물론 그 성과물이란 것이 느닷없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건 아니다. 그 옛적 단선율 음악이 진화하여 화성 음악이 되고 어느덧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발전하듯이,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 또한 나름의 진화 과정을 거치며 복잡하고 정교해졌다.
 
▲ 타유방의 요리서 14세기 프랑스 왕실의 전속 요리사 기욤 드 티렐이 쓴 책이다. 와인을 요리 재료로 활용하는 다수의 기록이 남아 있다.
ⓒ 임승수
플리니우스의 <박물지>(Naturalis Historia)나 아피키우스의 <요리서>(De re coquinaria) 같은 고대 로마 문헌에 따르면 로마인들은 빵을 와인에 적셔 먹었으며 와인에 꿀을 섞은 물슘(Mulsum)을 식전주로 사용했고 구운 고기에 고급 레드 와인인 팔레르니아를 즐겼다고 한다. 14세기 프랑스 왕실의 전속 요리사 기욤 드 티렐이 쓴 <타유방의 요리서>(Le Viandier de Taillevent)에는 와인을 요리 재료로 활용하는 다수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아래의 글은 그 예다.
 
가금 커민 요리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 고기를 포도주와 물로 익힌 다음 사분하여 비계 기름에 튀기라. 포도주를 약간 마련하여 부용에 붓고 체에 거른 다음 고기와 함께 끓이라. 버주스와 포도주에 담근 생강과 커민 약간과 함께 달걀 노른자를 듬뿍 마련하여 잘 휘젓고, 불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포타주 안에 풀어 넣으라. 뒤끓지 않게 조심하라.
 
하지만 이러한 정도로는 음악으로 치자면 단선율 음악과도 같아서 와인-음식의 페어링의 전문화 및 체계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현대적 의미의 와인-음식 페어링에 선구자 역할을 한 사람은 앙드레 시몽(André Simon, 1877-1970)이다.
프랑스 태생으로 영국에서 와인 상인으로 활동했으며 1933년에 국제 와인 & 음식 협회(IWFS)를 창립해 와인-음식 페어링의 대중화에 힘을 쏟았다. 그는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1956년에 출간한 'The Wine and Food Menu Book'에서는 1월부터 12월까지 달마다 12가지 와인-음식 페어링을 소개하며 총 144가지 메뉴와 500종 이상의 와인을 다룬다.
 
▲ The Wine and Food Menu Book 1월부터 12월까지 달마다 12가지 와인-음식 페어링을 소개하며 총 144가지 메뉴와 500종 이상의 와인을 다룬다.
ⓒ 임승수
 
사회가 풍요로워질수록 요리 가짓수와 와인 종류는 끊임없이 늘어나며 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와인-음식 페어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와인-음식 조합의 가짓수는 무한대로 늘어났으나 안타깝게도 이 모든 조합을 개인이 일일이 경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루 섭취 음식량도 제한적인 데다가 과도한 음주는 건강을 크게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정된 기회에서 최선의 경험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와인-음식 페어링 지침이 필요하다. 여러 음이 동시에 울릴 때 조화를 이루려면 엄격한 화성법이 필요한 것처럼.

현재 와인-음식 페어링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캐런 맥닐(Karen MacNeil)은 자신의 저서 <더 와인 바이블>(The Wine Bible)에서 와인-음식 페어링의 10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고급 요리에는 고급 와인, 소박한 요리에는 소박한 와인을 페어링한다.
2. 섬세한 음식에는 섬세한 와인을, 강렬한 음식에는 강렬한 와인을 페어링한다.
3. 페어링할 때 음식과 와인의 풍미를 상호보완적으로 할지 대조적으로 할지 선택한다.
4. 해당 와인 품종이 얼마나 음식 친화적인지를 고려한다.
5. 과일이 들어간 요리에는 과일 향이 강한 와인이 잘 어울린다.
6. 짠맛 나는 음식은 산미가 있는 와인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7. 짠맛 나는 음식은 단맛 나는 와인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8. 고지방 음식은 진하고 강한 풍미의 와인과 잘 어울린다.
9. 감칠맛 나는 음식은 와인과 더욱 잘 어울린다.
10. 단 디저트와 단 와인을 페어링할 때는 와인이 더 달아야 한다.
 
▲ 리히터 에스테이트 리슬링 리슬링은 매콤한 한국 음식과 찰떡궁합을 보여준다.
ⓒ 임승수
 
캐런 맥닐이 주꾸미볶음을 맛봤다면

작년 이 무렵 경기도 파주 교하도서관에서 저자 초청 강의를 했다. 1부에서는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 자격으로 피아노 취미의 즐거움과 충만함을 얘기하고 강의 중간에 쇼팽, 브람스, 바흐의 피아노 소품도 연주했다. 2부에서는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저자로서 슬기로운 와인 생활 비법을 공개하고 주꾸미볶음에 상큼한 리슬링(화이트 와인)을 곁들여 참가자와 함께 나누었다.

레드 와인에 치즈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예상한 참가자들은 한국 음식과 독일 화이트 와인의 국경을 초월하는 찰떡궁합에 감탄사를 쏟아냈다. 예순을 넘은 참가자가 남긴 후기는 당시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아마추어 연주자의 연주라서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브람스의 곡은 중간에 다시 치시기도 하셨고, 바흐 아리오소는 도중에 악보가 건반으로 떨어지기도 했는데, 저는 그런 점들이 오히려 더 좋았습니다. 와인 시음 강연도 편안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와인 맛에 먼저 깜짝 놀랐고 안주와의 궁합에 두 번 놀랐으며, 강사가 수시로 음주(?)하며 강연하시는 모습에 세 번 놀랐습니다. ㅎㅎ 시종일관 웃음을 선사해 주시고 행복해 보이셔서 참석자들 모두 즐거워하고 행복한 시간 보냈습니다. 늘 지금처럼 행복하신 모습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행복을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 파주 교하도서관에서 강의 중인 필자 수시로 음주하며 강의하는 모습에 참가자들이 박장대소했다.
ⓒ 교하도서관
 
문득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떠오른다. 한국 전통 판소리와 힙합, 록 등의 현대적인 음악 요소가 결합해 친숙하면서도 개성 있는 음악이 탄생하지 않았나. 와인-음식 페어링의 진화는 어느덧 토종 한국 음식과 물 건너온 와인의 창조적 융합 단계에 이르렀다.

캐런 맥닐이 파주 교하도서관의 술자리에 참석했다면 주꾸미볶음과 리슬링이 만들어 내는 화음에 놀라 자신의 페어링 10원칙을 11원칙으로 수정할지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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