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금융사]대공황과 세계 경제위기는 정책의 잘못이었다

2024. 6. 1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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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주의자 경제학자 프리드먼
"1929년 대공황 확대는 Fed 책임"
2차 세계대전후 경제사 특징
장기간 깊은 불황 없었다는 점
Fed 적절한 대응으로 극복해와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뉴욕타임스(NYT)는 신문 1면에 ‘1987년, 1929년의 재현인가?’라는 자극적인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주가가 정점 대비 3분의 1로 폭락해 미국인은 1조달러 손해를 보았다. 공황의 악몽이 다시 떠올랐다. 주가 붕괴의 원인을 두고 치열한 논란이 잠깐이지만 격렬하게 오고 갔다. 세계대전 이후 가장 중요한 경제적 사건은 장기에 걸친 깊은 불황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다시 자본주의의 광기와 우울함에 대면해야 한다니….

1929년 10월 16일, 예일대학 경제학과 교수 어빙 피셔는 미국의 주식가격이 "영원히 하락하지 않는 고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일 후인 검은 목요일에 다우지수는 놀랍게도 23%나 하락해 단 하루 개장으로 주가가 10% 이상 하락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사실 주식시장은 9월 초부터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10월 23일에는 이미 6%나 급락했고, 이때부터 월스트리트 붕괴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후 3년 동안은 미국 주식시장은 89% 하락하더니 1932년 7월 최저점에 도달했다. 미국의 생산량은 기존의 3분의 1 수준으로 무너져 내렸다. 노동인구의 3분의 1이 실업자였다. 오로지 소비에트연방만이 자급경제와 계획경제 덕분에 이 여파를 피해 갔다.

통화주의자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에 의하면 공황은 다행히도 정책의 잘못이다. 다시 말하면 제대로 된 정책을 실행하면 공황 같은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제대로 된 정책이 중요하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프리드먼은 1929년 위기를 대공황으로 확대한 책임자가 다름 아닌 연방준비제도(Fed)라고 주장했다. 주식거품 자체는 Fed의 탓이 아니지만, 벤저민 스트롱 사후 Fed는 잘못된 정책을 채택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연은)의 초대 총재 벤저민 스트롱은 금본위제 유지라는 미국의 국제 의무와 가격안정이라는 국내 의무를 균형감 있게 성실히 완수했다. 당시 Fed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대량의 금을 불태화하여 통화팽창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했다. 또한 공황 당시에도 Fed는 채권을 매입하여 유동성을 주입하는 식으로 적절히 대응하였다. 그런데 스트롱이 결핵으로 사망한 이후 워싱턴의 연방준비이사회는 통화정책에 실패했다. 무엇보다 Fed는 은행 파산이 초래한 신용 수축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이슈는 주식시장 붕괴가 있기 수개월 전, 당시 8000만달러를 이상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던 상업 은행들이 예금 지급을 중단했을 때 이미 예고되었다. 그러한 자금경색의 상황에서도 Fed의 금보유고는 법정 기준치보다 10억달러 이상 많았는데도 유동성을 위한 조치는 없었다. 1930년 11월과 12월 608개의 은행이 파산하면서 예금손실액이 5억달러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은행파산에 대한 적절한 정책을 도입하지 못했다.

대공황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는 증권법을 도입했다. 이 법은 시장에 대한 새로운 제한은 최소화하면서 증권을 발행하는 모든 회사가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재무제표를 포함하여 많은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특수 관계인과의 거래와 다양한 형태의 시장 조작은 금지되었다. 1920년대에 일반적이었던 신용거래는 엄격한 제한이 걸렸다.

그런데 Fed는 이러한 시장의 움직임도 잘못 읽었다. Fed는 이자율을 5.5%에서 6%로 올렸다. 불행하게도 금리 인상 시기가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다. Fed는 미국 경제가 1929년 8월에 정점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했다. 신용 시장을 긴축하면 주가가 아마도 10% 정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확실히 90%는 아니었을 것이다. 공세적인 투자 전문기관들이 주식시장이 더욱 하락할 것으로 예상해 매도에 나서자 Fed는 이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뉴욕증권거래소의 전자거래시스템이 무너지고, 선물과 옵션 시장의 급락을 차단해주는 매매거래 중단장치도 없었다. 그 상태에서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렇지만 놀라운 점은 그 이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열렬한 통화주의자들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는데도 평온했다. 더구나 경기후퇴도 없었다. 모든 것들이 다시 일상으로 곧 돌아갔다.

검은 월요일 이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우지수는 붕괴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이 상황의 일부는 중앙은행장, 폴 보커에게 직무를 넘겨받은 Fed 신임의장 앨런 그린스펀 덕택이었다. 그린스펀은 검은 월요일 사태에 신속하고도 적절히 대응했다. 그린스펀의 Fed는 유동성 공급으로 경제 및 금융시스템을 지원할 채비를 갖추었다. 뉴욕은행과 시장은 이를 사태가 나빠지면 구제금융이 발동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공채를 사들인 Fed는 절실했던 현금을 투입할 수 있었다. Fed에서 조달하는 차입비용도 2%가량 낮추었다.

월스트리트는 다시 숨통이 트였다. 시장이 예상한 ‘그 일’은 터지지 않았다. 그린스펀이 1987년 10월 미국 주가 폭락과 한국 등 신흥시장 위기, 러시아 채무불이행, 닷컴버블 사태 등을 무리 없이 상황에 적절하게 조처를 했다. 만약 금융시장이 붕괴하고 경기침체가 장기화했다면 세계 경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산성이 높아지면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지 않고서도 경제성장의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주장이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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